문화체육관광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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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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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바이러스-19 확산 방지 및 감염 예방을 위해 모든 전시해설을 잠정 중단합니다.
향후 추이에 따라 재개여부를 공지하겠습니다. 관람객여러분들의 협조와 양해 부탁드립니다.

한국어

한국어 해설안내의 요일별 오전,오후 해설시간을 보여줍니다.
오전 오후
매일 10:30 14:00
  • 해설장소 및 소요시간: 5층 역사관 약 50분 소요
  • 시작장소: 1층 안내데스크 앞
  • 코로나바이러스-19 확산 방지를 위해 반드시 마스크 착용 후 관람하시기 바랍니다.
  • 해설참가 인원은 회당 10명 이내 선착순으로 운영됩니다. (참가자 목걸이 배부)
  • 단체 및 외국어 전시해설은 하단 (전시해설 예약 및 문의) 항목을 참조 바랍니다.  

외국어(외국인 객원 해설사)

  • 대상: 5명 이상 10명 미만 외국인으로 구성된 단체
  • 해설가능 외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아랍어, 암하라어, 러시아어, 베트남어, 몽골어, 아제르바이잔어, 투르크메니스탄어, 키르기스스탄어, 우즈베키스탄어

전시해설 예약 및 문의

  • 메일 : m37039200@korea.kr (날짜, 시간, 인원(5명 이상 10명 미만), 연락처, 해설언어 기재)
  • 전화 : 02-3703-9250
  • 메일 확인 및 회신 시간 (월-금, 10시-17시 / 공휴일 및 휴관일 제외)
  • 메일로 해설 요청 시 방문 희망일로부터 최소 3일 전에 문의요망

주제별 전시해설

온라인 전시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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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역사관 전시를 온라인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 프롤로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1890년대부터 현재까지를 다루는 국립 근현대사박물관입니다. 일제강점기, 6·25전쟁 등 여러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민주화와 경제발전, 시민사회 성장을 이뤄낸 대한민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역사 문화 공간입니다.

역사관은 총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1부는 자유, 평등, 독립을 꿈꾸며, 제2부는 평화, 민주, 번영을 향하여, 제3부는 나-대한민국-세계로 구성되어있습니다.

1 부 1890~1945 자유, 평등, 독립을 꿈꾸며

이곳은 역사관 1부이며 “자유, 평등, 독립을 꿈꾸며”라는 주제로 1894년부터 1945년 광복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1-1 근대국가를 향한 노력과 좌절

1) 동학농민운동 / 전봉준 공초
개항 후 외세간섭과 부정부패로 인한 사회혼란은 결국 1894년 동학교도들을 중심으로 한 농민봉기로 이어졌습니다. 관군에게 승리한 농민군은 전주에서 관군과 화약을 맺으며 물러났지만,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철수하지 않자 나라를 구하기 위해 다시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게 농민군은 결국 패배하였고, 지도자인 전봉준이 처형되면서 봉기는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당시 전봉준의 심문내용이 담긴 전봉준 공초를 볼 수 있습니다.

2) 독립신문 / 대한매일신보 / 제국신문 / 황성신문

조선은 개항 이후 언론활동과 출판활동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박문국이라는 기관을 세워 1883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행하였고, 󰡔한성순보󰡕를 시작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지이자 순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했습니다. 독립신문에 이어『제국신문』,『황성신문』등도 잇달아 발행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 베델과 양기탁이 1904년에 창간한 일간지로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온 통신원이었던 베델이 발행인을 맡았습니다. 이러한 언론‧출판 활동은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국권회복운동에 기여하였습니다.

3) 의병부대(사진) / 남한대토벌작전 / 안중근 유묵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게 됩니다. 이후 1905년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는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1907년에는 헤이그특사를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나라를 잃어가는 과정을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이들을 의병이라고 부르는데 정미의병은 군대해산으로 인해 해산된 군인들이 대거 참여했고, 이전과는 달리 평민 의병장들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의병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일제는 이를 막고자 ‘남한대토벌 작전’을 펼쳤습니다. 의병탄압성공을 기념하여 제작한 사진첩에는 생포된 의병들의 모습과 탄압과정의 사진들이 담겨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중국 여순감옥에서 남기신 행서 중 하나인 이 유묵은 ‘국가안위노심초사’,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라는 뜻으로 당시 안중근 의사를 취조했던 야스오카 검찰관에게 써준 글씨를 그의 딸이 잘 보관하고 있다가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하면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유묵 왼쪽 하단에는 대한국인 안중근, 그리고 손바닥 모양의 도장이 있는데, 네 번째 손가락이 짧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의거 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의단지회라는 비밀독립조직을 결성하고 본인의 넷째 손가락 첫 마디를 잘라 태극기에 혈서로 대한독립이라고 쓰며 조국 광복을 다짐했습니다. 이 유묵을 통해 안중근 의사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4) 병합조약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맺은 병합조약은 ‘조선에 대한 모든 것을 영구히 일본에게 넘겨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식민통치의 시작과 그 방침을 알리는 일본 통감의 담화문도 함께 전시하고 있습니다. 1910년 일본은 최고통치기관인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습니다.

1-2 민의 성장과 민국 선포

5) 기미독립선언서

3·1운동은 우리나라 한민족 최대의 항일독립운동이었습니다. 3·1운동을 대표하는 유물 중의 하나인 기미독립선언서가 전시되어있습니다. 기미독립선언서는 1919년 3월 1일 3·1운동을 기하여 민족대표 33인이 한국의 독립을 국내외에 선포하는 글입니다. 조선은 자주적인 독립국가임을 명시하고 있고, 비폭력적이며 인도주의적인 독립방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6) 대한민국임시정부 초기 청사

3·1운동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 곳곳에서도 일어나며 확산되었습니다. 이에 우리나라에도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기관의 필요성이 대두되며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공화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국 상하이에 설립되었습니다.

7) 의정원태극기 / 나의 독립영웅 스토리영상

의정원 태극기는 1923년 대한민국임시의정원에 걸려있던 것으로,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김붕준과 그의 아내 노영재가 함께 제작한 것입니다. 또한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우리 박물관과 KBS가 공동제작한 ‘나의 독립영웅’ 영상을 아카이브 존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8) 상해판 독립신문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선전 활동으로 기관지인 독립신문을 발행하였습니다. 독립협회에서 발행한 독립신문과 구분하기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발행한 것은 상해판 독립신문이라고 불립니다. 독립신문은 당시 임시정부의 무력투쟁, 외교활동, 국내소식 등을 담고 있는 기록물입니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독립신문은 창간호이며, 독립신문 아카이브에서는 목록과 그 해당기사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9) <한글> 창간호

일제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한글연구와 한국역사연구를 이어나갔습니다. 대표기관 중 하나인 조선어학회에서 발간한 <한글>창간호가 있습니다. 조선어학회는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 속에서도 한글의 연구와 보급을 위해 1933년 10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발표하였고, <한글> 잡지를 발간하는 등 우리말을 지키는데 앞장섰습니다.

1-3 경제구조의 변화와 민의 삶

10) 경제구조의 변화와 민의 삶

일제강점기의 우리나라사람들은 적은 임금과 장시간의 노동 등 그야말로 일본인과의 차별이 담긴 노동환경에서 작업을 해야만 했습니다. 특히 여성 노동운동가의 삶은 더욱 고단했습니다. 당시의 대표적인 여성노동운동가 강주룡은 평양에 있는 평원고무공장의 노동자였는데, 사측의 일방적인 임금삭감 통보와 일본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에 분노하여 을밀대 위로 올라가 고공농성을 펼쳤습니다. 강주룡의 을밀대 시위 사진과 함께 그녀의 당시 인터뷰도 확인해보실 수 있습니다. 또한 <소설가 구보씨의 경성 산책> 통해 당대의 풍경과 삶을 상상하고 공유해보실 수 있습니다.

1-4 신교육과 신문화

11)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창립총회 기념 / 민립대학설립 총회 출석 통지서

일본은 교육정책을 통해 일본의 정신과 문화를 가르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반발한 한국인은 학교설립 운동을 펼쳤으며, 대표적인 운동으로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있습니다. 민립대학설립운동은 차별적 교육정책에 맞서 민족의 역량을 기르기 위한 것으로, 그와 관련된 당시의 민립대학 기성총회 단체사진과 출석통지서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2) 군산풍천 백화점 홍보 전단 / 화신양행 홍보물 / 축음기

신교육과 함께 신문화도 등장하며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백화점도 등장하였는데, 1930년 군산에 설립된 군산 풍천백화점 홍보전단과 화신백화점 홍보물이 전시되어있습니다. 신문화 하면 음악도 빼놓을 수 없는데, 축음기가 보급되고 라디오 방송국이 생기면서 대중가요가 등장하여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축음기는 당시 전화기, 전기와 더불어 사람들에게 놀라운 볼거리이자 신문물의 대표적인 상징입니다.

1-5 강제동원과 저항

13) 창씨개명 호적부 / 놋그릇 대용 사기그릇

일제시대에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감시 대상이 되어 학교에 갈 수 없었고, 이와 함께 배급에서 제외되기도 했는데 창씨개명이 드러나 있는 호적부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일제는 군사용품에 사용할 금속 확보를 위해 사진과 같이 민가에서 사용하는 놋그릇, 숟가락까지 공출했습니다. 놋그릇을 공출하는 대신 대용품으로 사기그릇을 주었습니다. 사기그릇에는 결전이라는 글씨와 어뢰가 그려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4) 황국신민의 서사 / 일본어 사용 장려 포스터 (이야기존)

화면에 보이는 포스터들은 일제가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고 강제 징병을 추진하며 만든 포스터들로, 중앙에 있는 포스터에는 ‘훌륭한 군대를 배출하기 위해 국어생활을 실행하자’는 문구가 적혀있습니다. 나아가 일제는 신사참배, 궁성요배, 그리고 황신민의 서사 등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일본의 충성스러운 신민이 될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또한 <선동과 낙서>라는 주제로 개인이 일제의 억압체제에 어떻게 저항했는지를 체험해 보실 수 있으며, 또 다른 이야기존에서는 <접어둘 수 없는 이야기> 라는 주제로 강제동원 일본군 위안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5) 동지 동포에게 보내는 공개 서신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행사 참관기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한국인들은 끊임없는 독립운동을 통해 통합을 위한 노력을 펼쳤습니다. 대표적으로 1939년 5월 김구와 김원봉이 좌우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합의하고 발표한 공개 서신이 있습니다. 이 서신은 동포들에게 보내졌으며, 그 내용으로는 기존 독립운동 방법에 대한 반성과 단일 조직의 수립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1940년 9월 중국 충칭에 입성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일항전을 위해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결성하였습니다. 이와 관련되어 한국광복군의 배지와 기록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물은 담당 실무자였던 독립운동가 엄항섭이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한 것입니다. 이렇게 광복을 향한 대일항전을 위한 노력은 곳곳에서 이어졌습니다.

* 에필로그

지금까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상설전시실 역사관 온라인 해설을 체험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 영상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역사관 전시를 온라인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 프롤로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1890년대부터 현재까지를 다루는 국립 근현대사박물관입니다. 일제강점기, 6·25전쟁 등 여러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민주화와 경제발전, 시민사회 성장을 이뤄낸 대한민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역사 문화 공간입니다.

역사관은 총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1부는 자유, 평등, 독립을 꿈꾸며, 제2부는 평화, 민주, 번영을 향하여, 제3부는 나-대한민국-세계로 구성되어있습니다.

2부 1945~1987 평화, 민주, 번영을 향하여

이곳은 “평화, 민주, 번영을 향하여”라는 주제로 1945년 대한민국 광복부터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전까지를 전시시기로 다루고 있는 역사관 제2부입니다.

2-1 광복과 분단

16) 8·15 해방 당시 시민들(이미지) 38선 설정(이미지)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드디어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광복의 기쁨을 만끽하는 모습, 부산항을 통해 귀환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광복을 맞아 기념우표와 엽서가 발행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상호 견제를 위하여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습니다. 38선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소련의 지지를 받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고, 남쪽에는 미군정이 1945년부터 1948년까지 3년간 이어지게 됩니다. 당시 한반도는 대립과 갈등 속에서 미래에 대한 준비와 희망이 교차하는 공간이었습니다.

17) 신탁통치 반대 성명서 전단 / 대한민국정부통령 및 초대내각 포스터 / 5·10총

선거 포스터 / 제헌국회 입법활동 / 북한 헌법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사항 일부만이 부각되어 왜곡 보도 되면서 한반도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우익세력과 찬성하는 좌익세력으로 나뉘어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한반도문제는 유엔으로 이관되어 유엔은 남북 통합정부 수립을 위해 총선거를 결의하였으나 북한과 소련의 거부로 한반도 전역의 선거는 무산되었고, 남한만의 선거가 결정되었습니다. 1948년 5월10일 시행된 총선거는 만21세 이상의 남녀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대한민국 최초의 보통 선거였습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단독 선거 및 단독 정부 수립 반대 등을 이유로 제주 4·3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선거를 치를 수 없었던 제주도 2개 선거구의 2명이 빠진 198명의 국회의원으로 제헌국회가 만들어졌습니다. 국회는 헌법을 공포하고,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을 선출했습니다.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정부수립 국민축하식’이 열렸습니다. 제헌국회는 친일파 처벌을 목적으로 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농지개혁, 의무교육 등을 포함한 다양한 입법 활동을 펼쳐 나갔습니다. 북한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총선거를 실시하여 헌법을 채택하고, 9월 9일 수상을 김일성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습니다. 이러한 남북의 정부수립 과정을 연표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2-2 6·25전쟁과 그 영향

남과 북에서 각각 정부가 수립되자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북한의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의 무력 지원을 배경으로 1950년 6월 25일 기습적으로 남침하면서 6·25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18) 정전협정문 / 한미상호방위조약 / 항미원조 가방

당시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던 남한은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며 낙동강까지 후퇴했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한 UN연합군이 6ㆍ25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이후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국군은 압록강 부근까지 진격하지만 1950년 10월, 중국인민지원군이 전쟁에 개입하며 북한군은 다시 38선을 넘어 남진했습니다. 이렇게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에도 휴전을 위한 노력은 이어졌습니다. 1953년 7월 27일 비로소 정전협정이 체결되어 남북은 휴전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여기 보이는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항미원조 가방을 통해서 6ㆍ25전쟁이 국제전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한미동맹, 북중관계와 같은 국제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19) 피난민 / 전쟁이 남긴 상처 / 계속되는 삶

6ㆍ25전쟁 중에는 이렇게 전선이 수시로 변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피난을 거듭해야 했습니다. 전쟁 중 피난민들은 북한군의 부역자가 아님을 증명하고 식량배급을 받기 위해서 발급된 증명서를 지니고 있어야 했습니다. 또한 한강 인도교 폭파, 피란, 노근리 사건 등의 민간인 학살, 주민 간의 적대, 이산가족, 납북자 등을 상징화하고 있는 일러스트 및 당시 다큐 사진과 원본 자료, 모형을 통해 전후 한국사회상과 삶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특히 구두닦이 통은 황인덕씨가 당시 실제로 사용했던 자료로 원본자료와 함께 기증자 구술영상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2-3 민주주의의 시련

20) 1960년 정·부통령선거 자유당 포스터 / 4·19혁명 당시 기증자료 / 4·19혁명~5·16군사정변~유신헌법 공포까지의 과정(이미지) / 10월 유신홍보 포스터

이승만 대통령은 야당탄압과 부정선거를 통해 두 차례의 개헌을 강행하며 종신집권을 꾀했습니다. ‘3·15 부정선거’로도 잘 알려져 있는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은 이기붕 후보를 부통령에 당선시키는 부정 선거를 저질렀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국민들의 분노는 4·19 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고등학생으로 4·19 혁명에 참가했던 분들이 기증해주신 자료들로, 학교 등사기로 직접 제작한 석방요구 시위 전단과 혁명의 순간을 생생하게 기록한 일기입니다. 이렇게 4·19 혁명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되고, 교수들의 시국선언, 국민들의 참여로 전 국민적인 시위로 발전했습니다. 그 결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선언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국민이 직접 정권의 부정부패를 심판한 4·19 혁명은 한국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었고, 4·19 혁명 이후 제2공화국이 출범했습니다.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장면이 헌법상 행정의 실질적인 권한을 가진 국무총리로 취임합니다. 장면 정부는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경제개발을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억압되었던 사회적 요구가 곳곳에서 분출되었고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일부 군부세력이 5·16 군사정변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군부세력의 수장이었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1963년, 군으로 복귀하겠다는 혁명공약을 번복하고 전역한 후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제3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정권 연장을 위해 삼선개헌을 추진해 통과시키고, 1972년 10월에는 계엄령을 선포한 후 영구 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을 제정했습니다. 각종 선전구호들과 통계자료를 실어 유신의 당위성을 주장한 홍보 포스터를 볼 수 있습니다.

21) 불온삐라를 보면 즉시 신고합시다 / 한일회담 / 베트남전쟁

키오스크에서 다양한 해방시기 전단, 포스터, 표어, 담화문, 삐라 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군사정변 이후 정부의 반공정책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불온삐라를 보면 즉시 신고합시다’라고 쓰인 포스터 및 반공교육을 위해 슬라이드로 제작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경제개발에서 일본의 협력을 얻고자했던 정부는 한일회담을 통해 한일국교정상화를 추진했습니다. 김종필과 오히라가 교환한 메모 내용을 근거로 1965년 한일기본조약이 조인되었으나 야당과 학생들은 반대 투쟁을 펼쳤습니다. 이 때 받은 대일청구권배상금은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에 사용되었지만, 회담의 조기타결에 치중한 나머지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아내지 못한 점은 지금까지도 한일관계의 문제점으로 남아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참전했던 한국의 군인이 귀국하면서 가지고 온 귀국상자를 볼 수 있습니다. 1964년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미국은 한국을 비롯한 우방국에 지원을 호소하였고, 이에 한국 정부는 32만 명의 군인들을 파병하였습니다. 파병된 군인과 기술자의 편지 등을 통해 당시 상황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베트남 파병은 한미동맹의 강화, 한국군의 현대화, 총 10억 달러가 넘는 외화수입을 가져왔지만, 1만 6천여 명이 넘는 사상자, 현재까지도 고통 받는 고엽제 피해자 등 수많은 희생이 따랐습니다.

2-4 경제개발

22)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삼백산업

정부는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수출 중심의 경제정책으로 가발, 신발, 의류 등 노동집약적 산업분야의 수출을 늘려갔습니다. 이후 1960년대 후반부터는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1970년대에 들어서는 중화학공업 중심의 산업단지가 조성되었습니다. 전쟁 이후 원조 받은 물자는 생활필수품과 농산물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원조 받은 물자를 가공하는 소비재 산업이 발달했습니다. 특히 면방직, 밀가루, 설탕 이렇게 하얀색 3가지를 이르는 삼백산업을 중심으로 소비재 산업이 발달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23) 대한민국1호 전자제품(금성A-501라디오, VD-191텔레비전)/ 포니

이야기존에서는 산업발전과 수출의 현장인 동시에 열악한 근로환경이었던 텔레비전 조립 공장을 재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금성사, 지금의 LG전자에서 출시한 대한민국 1호 라디오 A-501과 1호 흑백 텔레비전 VD-191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75년 현대자동차에서 만든 우리나라 첫 고유모델 승용차 포니를 볼 수 있습니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포니는 뉴질랜드로 수출하던 수출용 차량입니다. 포니는 국산1호 수출 승용차로도 기록되었습니다.

24) 파독 광부, 간호사 등의 유물 /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실천기간 팜플렛

국민들은 외국의 탄광과 병원, 사막의 건설현장까지 마다하지 않고 일하며 경제성장에 힘을 보탰습니다. 여기에는 독일로 파견된 근로자들이 탄광에서 일할 때 사용했던 가죽으로 만든 엉덩이 보호대와 독일 병원 근무 당시의 간호복과 신발, 중동 건설 노동자의 가방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라는 그늘도 있었습니다. 여기 보이는 전태일 열사는 1970년 평화시장 재단사로 일하던 중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라며 분신자살로 노동자들의 상황을 알렸습니다. 산업화 속에서 희생되는 노동자의 삶이 사회문제로 주목받게 됩니다.

2-5 농촌과 도시, 생활과 문화의 변화

25) 새마을 운동 클레이모형

도로를 정비하고 지붕을 보수하는 등 마을을 현대적으로 바꾸는 환경개선사업 중심의 새마을운동이 국가정책으로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농민의 실질 소득증대와 인구유출 감소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26) 가족계획포스터 / 서울 지하철 착공 기념판 / 아파트홍보물

6·25전쟁 이후 출생인구가 급증하다가 1970년대 이후 가족계획과 같은 정부의 강력한 산아제한정책으로 출생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급격한 도시화로 인한 인구집중에 따라 교통난, 주택의 부족 등 여러 문제들도 발생하였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서울 지하철 1호선 착공과 같은 대중교통 확장, 아파트 단지의 건설과 신도시 개발 등을 추진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정면에는 세운상가의 아파트동으로 만들어진 삼풍상가 아파트 홍보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주거환경의 변화와 기술의 발달로 생활의 모습도 많이 변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7) 입시고사장

교육은 사회적으로는 경제발전의 원동력이었고, 개인에게는 지위 상승의 통로였습니다. 1970년대부터 대학교와 전문대학의 수가 늘어났고 대학 진학률도 높아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입시경쟁이 과열되고 사교육이 성행했습니다. 중, 고등학교 입시 과열을 완화하기 위해 정부는 중학교 무시험 추첨제와 고등학교 평준화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1980년대에는 과외 전면 금지와 대학 졸업 정원제를 시행하는 등 과도한 교육열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고자 했습니다.

28) 조용필 1집 음반 <창밖의 여자> / 김기수 복싱글러브

정부의 검열과 통제 속에서도 통기타와 청바지로 대변되는 청년문화가 생겨났습니다. 텔레비전과 함께 대중매체가 보급되면서 대중문화가 발달했습니다. 대중가요, 드라마, 코미디가 큰 인기 끌었고, 이는 여가를 활용하는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여기에는 가수 조용필의 1집 음반, 프로야구 관중200만 명 돌파기념 페넌트, 그리고 한국최초로 복싱세계챔피언(1966년 WBA주니어 미들급)이 되었던 김기수 선수의 복싱글러브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2-6 국민주권을 향하여

1972년 수립된 유신체제의 통제와 억압이 강해지면서 그에 따른 저항도 거세졌습니다. 부산과 마산의 대규모 시위는 유신체제의 종말을 앞당겼습니다.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전두환과 신군부에 의해 좌절되었습니다. 하지만 신군부의 집권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이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29) <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

국민들은 정부의 억압과 탄압에 저항하고자 자유를 외치며 민주주의 운동을 펼쳐나갔습니다. 자유언론수호를 위해 발행된 동아일보 백지광고에 시민들은 격려광고로 화답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 걸렸던 <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는 실제 족자로 표구한 것은 아니고, 벽지에 쓴 것을 걸어놓은 것입니다. 1979년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로 촉발된 체제의 균열은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한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과 유신체제의 종말로 이어졌습니다.

30) 5·18민주화 운동과 당시 연세대학교 학생 일기

유신체제가 무너진 뒤 사람들은 민주화된 ‘서울의 봄’이 올 것이라 믿었으나 전두환과 신군부세력은 군사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이에 저항한 광주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한 후에 국가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여기 있는 자료는 당시 상황을 촬영한 사진과 1980년 광주에서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연세대학교 학생의 일기입니다. 전두환 정부는 사회통제를 강화하였고, 이러한 억압에 맞서 학생들의 저항이 이어졌으며, 야당은 김영삼과 김대중을 중심으로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하여 뭉쳤습니다. 이후 신한민주당을 1985년에 창당하고, 총선에서 제1야당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에필로그

지금까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상설전시실 역사관 온라인 해설을 체험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 영상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역사관 전시를 온라인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 프롤로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1890년대부터 현재까지를 다루는 국립 근현대사박물관입니다. 일제강점기, 6·25전쟁 등 여러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민주화와 경제발전, 시민사회 성장을 이뤄낸 대한민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역사 문화 공간입니다.

역사관은 총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1부는 자유, 평등, 독립을 꿈꾸며, 제2부는 평화, 민주, 번영을 향하여, 제3부는 나-대한민국-세계로 구성되어있습니다.

3부 1987- : 나-대한민국-세계

이곳은 “나-대한민국-세계”라는 주제로 1987년 민주화부터 현재까지를 전시시기로 다루고 있는 역사관 제3부입니다.

3-1. 6월 항쟁과 시민사회의 성장

31) 6월 항쟁 / 중앙일보 기사 모음 / 그때 그곳에서 당신은

신군부의 철권통치에 시민들의 반정부 시위는 계속되었습니다. 1987년은 무고한 학생들의 희생이 이어졌습니다. 첫 번째로,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고 발표하면서 국민들은 이에 분노하게 됩니다. 당시 사건을 보도한 중앙일보 기사를 통해 이때 이 사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추모엽서에 보이는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은 경찰이 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사망합니다. 이후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전국적으로 6월 민주항쟁이 계속 됩니다. 6월 항쟁의 규모는 얼마나 컸을까요? 앞에 도표에서 보이는 것처럼, 전국적으로 130만 명의 국민들이 참여했습니다. 그 결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의 내용을 담은 6·29 선언과 함께 대한민국은 국민의 손으로 민주화를 쟁취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현장을 신문기사 1면을 통해서 생생하게 느낄 수 있으며, 부산에서 이루어졌던 다양한 6월 민주항쟁에 관한 내용 또한 “그때 그곳에서 당신은”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3-2. 경제 호황과 대중소비의 시대

32) 호황 인포그래픽

한국경제는 1980년대 중반 유가·금리·환율이 모두 낮은 삼저호황을 누렸습니다. 그 후 십여 년간 생산과 소비에서 호황이 계속되었고, 일인당 국민총소득은 1981년 1천 8백 달러에서 1995년 1만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호황은 중산층 의식에 불을 지펴 1990년대 초에는 80% 이상 국민들이 스스로를 중산층에 속한다고 여겼습니다.

33)20세기 말 대중문화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렸던 비디오들, 카세트테이프와 그리고 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들과 함께 1992년 제작된 ‘서태지와 아이들’ 음반의 브로마이드를 볼 수 있습니다.

3-3. 세계화와 외환위기

34) 88 서울 올림픽 / 호돌이

1988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제24회 하계 올림픽이 개최되었습니다. 서울 올림픽 16일간의 경기뿐만 아니라 이전, 이후의 모든 일정이 성공리에 끝을 맺었으며, 앞에 보이는 호돌이는 88 서울 올림픽의 공식 마스코트로 전 세계인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36) 외환위기 / 대중문화로 보는 외환위기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가 찾아오게 되면서 재벌의 연이은 파산으로 시작된 경제위기에 결국 김영삼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됩니다. 일명 IMF 시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에 국민들은 금모으기 운동을 펼치며 이를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이 증서는 금모으기 운동에 참여하여 받은 증서입니다. 이후 김대중 정부는 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 아래에서 외환위기를 극복했습니다. 그러나 이 외환위기가 남긴 상처는 사회의 양극화로 이어졌고, 오늘날까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35) 한류와 문화교류

2000년대 이후 한국의 대중문화는 큰 주목을 받게 됩니다. 특히 소셜네트워크(SNS)를 통해 세계 각국에서 한류가 전파되고 있으며 2012년 가수 싸이의 ‘강남 스타일’, 그 이후에는 방탄소년단을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로 한류가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3-4 남과 북, 평화공존의 시대를 향하여

37) 탈냉전과 북방정책

1989년 독일이 통일되고, 1991년 소련이 해체하는 탈냉전은 한국의 대외관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노태우 정부는 공산권 국가와의 외교를 통해 남북 간 긴장완화와 평화를 위한 시도를 하게 되는데 노태우 대통령과 헝가리 체육장차관의 접견 내용을 메모한 박철언 전 청와대 정책보좌관의 업무노트와 러시아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선물한 화채 그릇, 중국의 리펑 총리에게 받은 다람쥐 자수그림 등이 북방정책의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38) 남북관계 / 남북 공동선언 발표 기념주화 /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

냉전이 종식되었지만 남북은 대화와 갈등을 반복했습니다. 연표를 통해 남북관계 변천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남북 공동선언 발표 1주년을 맞이하여 2001년 북한 조선중앙은행에서 발행한 기념주화 앞면에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악수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2018년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가진 정상회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방한계선에서 일어난 여러 차례의 군사적 충돌, 반복되는 북한 핵실험, 대북제재 등은 남북관계의 진전을 가로막았습니다.

3-5 시민, 경계를 넘어서

39) 네트워크 사회의 변화

한국사회는 인터넷과 통신기술의 빠른 발전과 함께 네트워크 사회로 진입하면서, 생활문화의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화면에 보이는 것이 삼성전자에서 제작한 국산최초 휴대전화입니다. 크기가 크고 모양이 벽돌과 닮았다는 이유로 ‘벽돌폰’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여러분들이 사용한 경험이 있거나 사용하고 있는 스마트폰 및 휴대전화의 발전에 따른 사람들 사이의 소통방식을 표현한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습니다.

40) 시민, 경계를 넘어서

1990년대 말 시작된 인터넷 혁명을 계기로 세계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시민들은 네트워크를 매개로 국가와 세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방식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나는 한국에 삽니다> 라는 주제의 이야기존에서는 국내체류 이주민 200만 명 시대에 한국에 살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습니다.

지금 세계와 관계를 맺는 나는 누구이며, 대한민국의 경계는 어디일까요? 우리가 앞으로 풀어야할 과제일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시간을 만나다

전시유물 75개 각각의 시간과 오늘의 시간이 만난 일력 화면을 꾸미고 프린트 할 수 있는 체험형 미디어 월입니다.

*에필로그

지금까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상설전시실 역사관 온라인 해설을 체험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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