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을 갖는 해 홍보 전단
1960년대 말 서울은 빠른 도시화와 주거 문제에 직면하며 새로운 형태의 아파트 건설을 추진했다.
당시 정책은 시민들에게 ‘내 집 마련’이라는 꿈을 선물하며, 주거 환경 개선과 사회적 안정을 목표로 삼았다.
새로 지어진 아파트는 현대적 시설을 갖추었지만, 급박한 건설 과정과 제한된 자원으로 인해 완벽하지는 못했다.
일부 사고와 시행착오는 정책 방향을 재조정하게 했고, 보다 안전하고 실용적인 주거 모델을 모색하게 했다.
오늘날 이 시기의 아파트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당시의 노력과 경험은 서울 주거 정책 발전의 중요한 발판으로 남아 있다.
글. 하정원(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료관리과 학예연구원)
1969년 서울시 주요 정책 중 하나인 시민아파트 건설은 급증하는 서울 인구와 무허가 판자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서울시는 1968년 12월 시민아파트 건설계획을 발표하고, 1969년부터 1971년까지 240억 원을 투입해 2,000동의 아파트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를 보여주는 자료가 ‘새해는 주택을 갖는 해’ 홍보 전단이다. 시민아파트 홍보를 위해 제작된 전단으로, 상단에는 ‘내집을 짓고 알뜰하게 가꿉시다, 셋집에서 내집으로, 판자집에서 아파트로, 내힘으로 내집을 장만합시다’ 등의 문구가 인쇄되어 있다. 중간 부분에는 ‘69년에 꼭 할 일’로 서울시의 건설 사업 목표, 직장 단위 조합주택, 상환 방법 등을 소개하고, 하단에는 시민아파트 구조를 안내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10일 김현옥 서울 시장은 69년도를 「마이홈의 해」로 정하고 시민아파트 2천동 건립계획 외에도 직장별 주택단지 조성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김시장은 영등포에 공장이 있는 10대 회사에 종업원 아파트건립을 요청, 시에서 벌일 시민주택사업의 일부를 맡도록 하겠으며 시민이 5명 이상 단위로 주택조합을 구성하면 적지를 알선, 주택을 건립토록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시장은 직장별 주택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도시계획국에 이를 전담하는 부이사관을 새로 임명하고 구획정리 중에 있는 창동, 우이동, 망우동, 면목동, 갈현동, 녹번동, 구파발, 서교동, 화곡동, 시흥동, 과천, 관악지역, 동작동 뒷산, 영등포 지역, 천호동, 광주지역의 매각채비지를 각 직장에 할당, 대여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1968년 12월 11일 자 기사
1969년도의 시민아파트는 가구당 평균 면적 11평(약 36㎡)으로, 거실 겸 안방, 작은 방, 부엌 겸 세면실이 일반적인 구조였다. 방을 나누는 벽은 시멘트 블록으로 되어 있고, 좁은 공간 활용을 위해 미닫이문이 많이 사용되었다. 화장실은 개별세대에 있는 경우와 공동으로 사용하는 예도 있었으나, 대부분 층별로 공용화장실을 사용하는 형태였다. 난방은 대부분 개별 연탄보일러를 사용했다. 당시로는 획기적인 주거 형태였으며, 중앙난방, 수세식 화장실 등 현대적인 시설을 갖추기도 했다. 하지만 좁은 면적, 부실한 단열, 공동 화장실 등 거주 환경은 열악한 편이었고, 짧은 공사 기간과 부족한 예산으로 인해 부실 공사가 만연하였다.
1970년 4월 8일에 발생한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은 시민 아파트 부실시공의 대표적 사례이다. 이 사건으로 김현옥 시장은 물러났다. 정부는 시민아파트 건립 계획을 중단하고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시범아파트 건설로 주거 정책 방향을 전환했다.
오늘날 시민아파트 대부분이 철거되었으며, 서울에는 회현제2시민아파트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이곳은 2004년 안전진단에서 D등급으로 분류된 후 현재 철거 및 재개발 사업이 본격 추진되고 있다.
‘市民아파트 建設 中斷 박대통령 지시 안전한 계획 다시 세우라’
박정희 대통령은 17일 『서울시가 계획한 70년도 시민 아파트 건설계획을 모두 백지화시키고,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새로운 아프트계획을 다시 세우라』고 신임 양택식 서울특별시장에게 지시했다.
<조선일보> 1970년 4월 18일 자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