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속 이야기

‘전설’이 된 해방공간의 박물관 사람들

광복 80주년 기념해 마련한 특별전 《1945-1948 역사 되찾기, 다시 우리로》는
새로운 세상을 준비했던 해방 3년의 다양한 노력에 주목했다.
당시 박물관 또한 그 치열한 노력의 한가운데에 있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바로 그곳에 고고학자, 민속학자, 심지어 화가까지 각기 다른 재능을 가진 이들이 모여들었다.
훗날 이들은 대한민국 문화예술계를 이끈 ‘전설’이 되었고, 그 여정의 출발점은 박물관이었다.

글. 김현정(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운영과장)

  • 새로운 장을 연 개척자들 :
    김재원, 송석하, 이경성

  • 해방공간의 국립박물관을 이야기할 때, 김재원(1909~1990)은 한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1945년 미군정기에 초대 국립박물관장이 된 그는 제1공화국부터 제3공화국(1970년)에 이르기까지 정권 교체의 격랑 속에서도 무려 25년간 관장직을 지켰다. 같은 기간, 오늘날 국가유산청의 전신(구왕궁사무청~문화재관리국) 수장이 무려 14번이나 교체되는 동안 국립박물관장은 오직 한 사람이었다. 이 25년 동안에 국립박물관 개관(1945), 호우총 발굴(1946), 문화유산의 부산 피난(1950), 첫 해외전시 《한국국보전》(1957) 등과 같은 드라마틱한 성과들이 펼쳐졌다. 그의 25년 재임은 그 자체로 박물관의 역사가 되었다.

    1946년, 민속박물관의 모태인 국립민족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초대 관장으로 삶의 소리를 기록한 송석하(1904~1948)가 임명되었다. 그는 탈춤·굿·생활사 등 사라져가는 우리의 전통을 수집한 민속학의 선구자였다. 민족 문화를 지키려는 그의 열정은 미군정 앞에서 더욱 빛났다. 개관을 앞두고 예산이 삭감되자 “전시할 유물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빈 건물을 지키는 관리인이 될 뿐”이라는 강력한 항의 서한을 보냈고, 결국 예산을 확보해 박물관의 문을 열 수 있었다. 비록 44세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가 남긴 유무형의 자산은 한국 민속학의 든든한 토대가 되었다.

    또 다른 박물관장 이경성(1919~2009)의 여정은 더욱 독특하다. 해방 직후 “박물관에서 일하고 싶다”라는 마음 하나로 무작정 미군정 학무국을 찾아가면서 박물관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이후 한국 최초의 공립박물관인 인천시립박물관에 초대 관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현실은 전시품 하나 없는 빈 건물이었다. 그는 일제가 군수 물자 생산을 위해 부평 조병창에 쌓아둔 중국 범종을 전시장으로 옮기고, 국립박물관과 국립민족박물관에서 유물 80여 점을 빌려 1946년 4월 어렵게 개관을 이뤄냈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한국의 대표적 미술평론가로 성장하고, 국립현대미술관장(1981~1983)으로 활동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 1947년 국립박물관 직원(장상훈, 2018, 「국립박물관 아카이브기행 4」, 『박물관신문』).
    ①임천 ②김원룡 ③김재원 ④장욱진

     

  • 역사의 퍼즐을 맞춘 역사 탐험가들 : 김원룡, 홍사준, 황수영

  • 고고학자 김원룡(1922~1993)은 1947년부터 국립박물관 생활을 시작했다. 입사 직후 맡은 개성 법당방 고분 조사는 광복 이후 우리 손으로 수행한 사실상 첫 발굴이었다. 고려 벽화가 확인된 이 발굴은 한국 고고학의 주체적 출발을 알리는 순간이었고, 그가 평생 고고학에 전념하기로 한 계기가 되었다. 학자로서 그의 궤적은 국사 교과서 첫 장을 장식하는 ‘전곡리 주먹도끼’ 발굴로 이어졌다. 1978년 미군 병사가 우연히 발견한 주먹도끼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한 그의 전곡리 발굴은 “동양에는 서양과 같은 정교한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없다”라는 서구 중심의 학설을 근본적으로 뒤집으며 세계 고고학의 판도를 바꾸었다.

    홍사준(1905~1980)은 해방공간에서 국립박물관 부여 분관의 초대 관장으로 시작해 잠시 경주를 거쳐 다시 부여로 돌아와 정년을 맞은, 말 그대로 ‘영원한 부여 지킴이’였다. 평생 백제사를 연구한 그의 업적은 특별하다. 1948년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 비석인 ‘사택지적비’를 찾아내어 잃어버린 백제사의 한 페이지를 복원했다. 그의 이름을 더욱 빛나게 한 순간은 1959년이다. 깊은 산속 바위 아래 잠들어 있던 서산 마애여래삼존상, 바로 ‘백제의 미소’를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이 홍사준이었다. 그의 눈길이 닿지 않았다면 온화하고 신비로운 이 ‘백제의 미소’는 지금도 깊은 숲속 어느 바위에 숨어 있었을지 모른다.

    개성 출신의 황수영(1918~2011)은 1948년 박물관에 입사해 경복궁 여러 전각 곳곳에 흩어져 있던 불상을 정리하면서 불교미술 연구의 길을 열었다. 1949년 개성 분관 인근에서 전운이 고조되자, 동료들과 함께 개성 분관의 주요 전시품을 31개 궤짝에 담아 서울로 긴급 이송했다. 그 덕분에 개성 유물은 오늘날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 ‘개성품’으로 남게 되었다. 1967년 교수시절, 경주 답사 중 경주 앞바다의 바위섬 ‘대왕암’을 보며 “저것이 문무왕의 수중릉이라는 것을 기억하라”라던 스승 고유섭의 유훈을 떠올리며, 대왕암이 문무왕의 수증릉일 가능성을 공론화했다. 이를 계기로 전설에 머물던 문무대왕릉은 역사적 실체로 자리 잡았고, 대왕암은 전 국민의 성지(聖地)가 되었다.

     

     

  • 예술가의 감성으로 되살아난 한국의 미 : 임천, 장욱진, 최순우

  • 해방공간에서 우리 문화유산을 기록하고 되살리는 작업은 임천(1908~1965)의 정교한 손끝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일본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그는 화가이면서 동시에 고건축 전문가였고, 수리공사를 홀로 감당할 수 있는 드문 존재였다. 그의 실력은 흔히 ‘신기(神技)’에 비유되었다. 호우총(1946), 법당방(1947), 감은사지(1959) 등 국립박물관 발굴조사에서 남긴 도면·벽화 모사도·사리장엄구 실측도는 “사진기보다 정교하다”라는 찬사를 받았다. 화엄사 각황전, 수덕사 대웅전, 숭례문, 석굴암 등 국보급 문화유산 가운데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 지금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 깊은 곳에는 그가 남긴 벽화 모사도와 실측도들이 그 시대를 기록하고 있다.

    “나는 심플하다”를 외쳤던 한국 화단의 거장 장욱진(1917~1990). 뜻밖에도 그의 첫 직장은 국립박물관이었다. 1946년 전후부터 박물관에서 근무한 그는 “도둑이 심해 밤새워 박물관을 지킨 날이 며칠씩 이어졌다”라고 회고하며, 해방공간 경복궁 일대의 혼란과 불안을 생생히 전했다. 1947년 개성 법당방 발굴에 참여한 그는 낮에는 고분 안에서 벽화를 모사하고, 밤에는 동료들과 동동주를 나누며 고단함을 달랬다. 법당방의 여러 벽화 중에서 별자리 모사도는 유독 장욱진의 화풍을 떠올리게 한다. 박물관에서 마주한 고분 벽화와 수많은 유물은 어쩌면 그의 작품 속에 스며든 한국적 미감의 원천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최순우(1916~1984)는 2002년 대한민국에 ‘인문학 열풍’을 불러온 상징적 인물이다. 그의 유고집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가 MBC <느낌표!>에 소개되며, 50만 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기 때문이다. 낯설던 건축 용어 ‘배흘림(Entasis)’은 국민적 상식이 되었고,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의 기둥은 그의 문장을 확인하려는 이들의 손길로 반들반들해졌다. 이러한 감식안의 뿌리는 개성박물관에서 스승 고유섭을 만나면서 싹텄다. 그는 문화유산을 단순히 ‘옛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는’ 아름다움으로 바라보게 했다. 최순우는 현대인에게 우리 문화를 보는 안목을 선사한 진정한 의미의 예술가이자 ‘미의 안내자’였다.

    해방공간의 박물관은 잃어버린 공동체의 과거를 복원하며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던 역동적 현장이었다. 그 현장을 지킨 이들은 박물관에서 쌓은 경험과 지식을 자양분 삼아, 훗날 각 분야의 거목(巨木)으로 성장했다. 해방기 박물관은 유산을 보존하는 공간을 넘어, 미래의 ‘전설’을 품고 길러낸 ‘문화 인큐베이터’였다.

    ▲ 개성 법당방 고분 내 별자리 벽화 모사도(국립중앙박물관 건판 23123).
    ▲ 임천의 감은사지 출토 사리장엄구 실측도(『감은사지 발굴조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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