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을 읽어보시라.” 1987년 민주화 이후 헌법이 많이 회자되는 요즘이다.
우리 역사에서 민주공화국을 천명한 최초의 헌법은 3·1운동 이후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제정한 10개 조의 『대한민국임시헌장』이다.
이후 임시정부에서 5차례의 개헌이 있었다. 3차 개헌 후 임시정부가 간행한 헌법의 정본(正本)인
『대한민국임시약헌(大韓民國臨時約憲, 이하 『약헌』)』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유일하게 소장하고 있다.
광복 80주년을 맞이한 뜻깊은 해에 이를 다시 펼쳐본다.
글. 오승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료관리과 학예연구관)
박물관이 소장한 『약헌』은 임시의정원(현재의 국회) 의장을 지낸 김붕준 선생의 유품이다. 2015년 김붕준 선생의 후손으로부터 유품 342건 629점을 일괄 수집했다. 모든 유품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에 대한 소중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귀중한 자료이며, 이 중『 약헌』과 ‘임시의정원 태극기’ 등 21건 27점은 국가등록문화유산이다.
김붕준의 유품에는 동일하게 인쇄된 『약헌』 2점이 있다. 하나는 인쇄된 상태 그대로 보존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40년 4차 개헌 과정 중 인쇄본 위에 붉은색의 펜으로 일부 내용을 수정·가필한 것(이하『 첨삭본』)이다.
▲ 『대한민국임시약헌』.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갈등, 재정난 등으로 혼란을 거듭하던 임시정부는 1925년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한 이후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을 중심으로 한 내각책임제로 개헌했다. 하지만 국무령이 자주 교체되는 등 임시정부의 혼란이 계속되자, 이를 수습하고 독립운동 진영의 통일을 위해 1927년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하는 세 번째 개헌을 단행했다. 3차 개정 헌법의 내용은 일본 측 기록이 부분적으로만 전해졌는데, 1987년에 『약헌』이 공개됨으로써 전체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총 50개 조로 이루어진 『약헌』의 1조와 2조를 살펴보자.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 국권(國權)은 인민에게 있음
광복 완성 전에는 국권이 광복운동자 전체에 있음
제2조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은 임시의정원에 있음
광복운동자의 대단결인 당이 완성된 때에는 국가의 최고 권력이 당에 있음
제1조의 첫 부분은 현재의 헌법과 비슷하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하고 그 국권이 인민에게 있음을 밝힌다. 국권은 주권과 통치권을 합한 개념이다. 그다음부터는 현재의 헌법과 많이 다르다. 광복 이전에는 국권이 독립운동가들에게 있다고 규정한 것은 나라를 빼앗기고 외국에 수립된 임시정부로선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제2조의 첫 부분은 오늘날과 다르게 헌법기관의 서열을 명시하고 있다. 입법부인 ‘의정원’을 최고 권력기관으로 규정했다. 의정원 의원 중 7인으로 상임위원회를 구성하는데, 예산 검사권, 국무회의 행정명령에 대한 동의·해제권, 독립운동과 외교에 대한 방향 설정 등 이들에게는 많은 권한이 있었다. 의원들로 내각을 구성하는 내각책임제와 달리 상임위원은 국무위원을 겸할 수 없었다. 2조의 뒷부분은 3차 개헌이 이념과 조직을 초월한 민족통일전선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던 ‘민족유일당 운동’ 과정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국가의 최고 권력이 정부가 아닌 당에 있는 것은 오늘날에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만 보이지만, 당시에는 중국 국민당의 예처럼 드물지 않은 체제였다. ‘민족유일당 운동’의 성공을 염두에 둔 조항이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1940년 광복군을 창설한 임시정부는 일본과의 전면전을 준비하는 전시내각을 구성하고, 김구 선생의 지도력을 ‘주석’으로 제도화하고자 개헌을 했다. 4차 개정 헌법은 『약헌』과 같은 정본이 전해지지 않지만, 다행히 『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 호외에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박물관이 소장한 『첨삭본』을 통해 4차 개헌 과정에 여러 쟁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첨삭본』의 표지에는 김붕준 선생의 다른 이름인 ‘김기원(金起元)의 사인’이 있는데, 내용을 첨삭한 이가 김붕준 자신임을 밝힌 것이다. 『첨삭본』과 실제 4차 개정 헌법을 비교하면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첨삭본에서 수정·삭제된 내용이 실제 개정 헌법에 모두 반영되었는데, 이는 일찍 합의에 도달해 개정된 부분으로 판단된다. 의정원이 최고 권력을 가진다는 2조가 통째로 삭제되는 등 주로 헌법의 근본 이념과 국체와 관련된 조항, 특히 의정원의 권한 축소에 대한 조항들이다.
다른 하나는 『첨삭본』과 실제 개정된 내용이 다른 경우다.『 첨삭본』에서는 상임위원회를 축소하지만 일부 기능을 살려두었고, 주석제로의 전환은 담지 않았다. 의정원의 권한 축소와 집단지도체제의 폐지 등은 4차 개헌에서 일찍 합의되었으나, 구체적인 주석의 권한과 상임위원회의 완전한 폐지 여부는 중요한 쟁점이었던 것이다. 김붕준 선생 등은 상임위원회와 의정원의 권한을 일정 부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4차 개정 헌법은 전시내각 성격이 강조되면서 주석제로 전환되었고, 상임위원회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 『첨삭본』의 수정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