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이 패망했다는 사실이 한반도 전국 팔도에 퍼져 나갔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한국인들은 일장기의 빨간 원에 파란색을 덧칠해 만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일제강점을 벗어나 광복을 맞이한 기쁨이 태극기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글. 이완범(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잡음이 심해서 알아듣기도 힘들었던 ‘종전조서’. 일왕은 전쟁 책임을 회피하려는 목적으로 이리저리 꼬기만 했을 뿐 패전과 항복은 물론 조선의 해방이나 독립이라는 말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당시 방송이 항복 선언일 것이라고 예상했던 한국인은 거의 없었다. 경성 방송국 직원들조차 일왕의 중대 발표가 소련에 대한 선전포고일 것으로 짐작했었다. 따라서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왕이 종전조서를 읽어 내려간 소위 ‘옥음방송’을 청취한 직후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한 사람은 있었을지 몰라도 한국이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이는 거의 없었다. 1943년을 기준으로 일본어를 아는 식민지 조선인의 비율은 20%에 불과했고, 문장 또한 일본인조차 이해하기 힘들 만큼 난해했던 탓에 일본어를 아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다.
당시를 기억하는 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라디오 소유가 제한적이었으므로 촌구석에 있거나 가난한 경우에는 방송을 접하기도 힘들었고, 들었더라도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들어야 한다고 해서 듣게 된 한국인들은 공공장소에서 청취했는데, 무슨 말인지 집중하기조차 힘들었다. 당시 경성방송국 취재기자였던 문제안은 전파 송출 상태가 나빠서 히로히토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히로히토의 조서를 방송으로 내보낸 직후 경성방송국 제1보도과 계장 후쿠다(福田)가 이를 일본말로 다시 전했고, 조선인 방송원 이덕근이 조선말로 번역된 조서를 또다시 방송했다고 한다. 그날 오후 경성방송국은 히로히토의 조서를 그런 식으로 몇 차례 되풀이해 내보냈고, 조서 내용에 대한 해설 방송도 했다. 서울 시민들은 1945년 8월 15일 오후에 방송된 해설을 듣고서야 일본제국이 패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놀라운 소식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다.
1945년 8월 16일 아침부터 조선 민중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다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이 외치는 격정의 만세 소리는 1919년 3월에 이어 삼천리 금수강산에 다시 메아리쳤다. 이렇게 서울 사람들은 하루 뒤인 16일에야 해방되었음을 알아차렸다. 한편 충북 충주에서 거주했던 유종호(충주 남산국민학교 5학년)에게 광복의 소식을 처음 전해준 이는 이종사촌 누이였다. 8월 15일 오후 시내에서 돌아온 누이는 “일본이 항복했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어”고 말했다. 다음 날인 8월 16일 학교 조회에서 교장 선생님은 “전쟁이 끝났으므로 방공호를 파는 일은 없을 거야”라고 했다. 엊그제까지 일제의 승전을 목청 돋우며 이야기하던 교장은 갑자기 독립과 해방 같은 생소한 단어를 썼다. 그날 하굣길엔 흰 바지저고리 차림의 아저씨들이 “좋다! 좋아!”라며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¹)
7일이 되어서야 학생들은 사괘(四卦)가 빠진 채 붉고 푸른 원형만 그려진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와 만세를 불렀다. 당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일장기의 빨간 원에다가 파란색을 덧칠해 태극 모양을 만든 것이다. 여기에다가 사괘를 추가한 것(사진 참조)은 그래도 양반이었다.
▲ 강원도 양지리 박원진 씨가 소유했던 일장기 개조 태극기. *출처: 『ᄃᆞㅣ한, 태극기』 (청주: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박물관, 2019), p. 87.
▲ 제2차 세계대전 참전 미군이 습득한 천 소재 태극기로, 일장기 위에 태극과 사괘를 그려 넣음. *출처: 『ᄃᆞㅣ한, 태극기』 (청주: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박물관, 2019), p. 86.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애국가도 난생처음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곡조(曲調)는 안익태 작곡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여’로 시작하는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이었다.
지방에서는 17일에야 해방 기념행사가 거행되었다. 만주에서도 17일에야 조선이 해방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한편 북한 지역에 있는 황해도 송하 공립심상소학교 교사 오기혁(당시 33세)은 “일왕이 벌벌 떨며 직접 전한 정오 속보의 요지는 다름 아닌 항복 선언이었다고 바로 파악해 동료 교사들과 눈물을 흘리며 서로 부둥켜안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라고 회고했는데²) , 일본어에 익숙한 인사의 예외적인 케이스였다. 방송 내용이 너무 모호해 직접 듣고도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 이가 부지기수였고, 방송을 접하지 못한 대다수 군중은 시간이 지나서야 주변에 나도는 입소문을 통해 해방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이렇듯 해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시점이 제각각이었음에도 감격과 환희는 매한가지였다고 평가되었다.
1945년 8월 15일은 패전 선언의 날, 8월 16일은 서울 해방의 날, 8월 17일은 전국 해방의 날이었다. 만 이틀 만에 한반도는 천지개벽, 상전벽해의 세상이 되었다. 혁명의 시기였다.
¹) 유종호, 『나의 해방 전후, 1940-1949』 (서울: 민음사, 2004), p. 114; [나와 8·15]<1>유종호 문학평론가·前연세대 특임교수, <동아일보>, 업데이트 2010년 8월 11일 15시 57분,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00810/30409972/1 (검색일: 2025년 6월 21일); 김성현, [새로 쓰는 대한민국 70년(1945~2015)] “광복은 내게… 지긋지긋한 솔뿌리캐기 안해도 됐던 것” : 유종호 예술원 회장의 그날, <조선일보>, 2015년 1월 1일 A6면.
²)오기혁, “황해도 봉산군 마동고급중학교 교사 오기혁 자서전”, RG 242, US National Archives; 김재용, “대중들의 눈에 비친 북한 지역의 해방: 자서전과 이력서를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98 (2019), p. 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