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속 이야기

아카이브, 기억의 층서학

과거는 우리에게 어떻게 도달하는가. 기억과 기록은 과거를 불러오는 주된 방법이다.
인간 기억의 확장인 기록을 통해 우리는 과거를 알고 현재로 이어진 시간성을 이해한다.
기록은 과거 사건이나 행위의 증거이자 과거를 기억하는 방법이다.

글. 설문원(부산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교수)

  • 누구의 기억을
    남길 것인가

  • 기록은 과거의 시간을 어떻게 재현할 수 있을까? 19세기 말 서구에서 등장한 근대 기록학에서 아카이브는 정부나 엘리트 계층의 활동이 퇴적된 결과물이었다. 이러한 활동을 온전히 재현하기 위하여 출처와 원 질서를 존중하는 기록 관리의 원칙들이 고안되었으며, 이때 아카이브는 물려받은 유산이자 ‘보존’되어야 할 완전한 유기체였다. 이렇게 관리된 기록들은 국가의 공식 기억, 이른바 국사(國史)를 지향하였다.

    프랑스혁명 이후 프랑스를 비롯하여 구미 각국이 잇따라 국가기록원을 설치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국가의 정체성과 역사가 담긴 하나의 거대 서사(meta-narrative)를 쓰는 것이었다. 이러한 국가 아카이브에 보통 사람들의 기억이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70년대 중반 미국기록전문가협회 회장이던 제럴드 햄은 공공 아카이브의 이러한 경향을 비판하며 ‘아카이브의 변두리(archival edge)’를 포용하는 기록화를 주창하였다. 아카이브가 소외계층을 포함한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서사를 수용해야 과거라는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를 재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현재의 시각에서
    새롭게 발굴되는 과거

  •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국가 주도의 공식 기억이나 거대 서사를 넘어 수많은 작은 서사, 대항 서사를 남기기 위한 기록 활동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인권과 평등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소외되었던 사람들의 기억을 포용하는 아카이브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국가 폭력이나 사회적 사건의 희생자, 여성, 사회적 소수자 등을 위한 아카이브들이 그 사례다. 현재의 가치가 과거를 새롭게 재현하는 기준, 즉 아카이빙의 동력이 된 것이다.

    현대 기록학에서 ‘과거’는 이미 존재하는 하나의 실재가 아니라 구성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정부나 권력 집단의 관점에서 구성된 과거가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겨진 기록은 불완전하고 비대칭적이며 편파적이다. 게다가 기록은 과거를 재현하는 중립적인 거울이 아니며, 생산자의 현실 인식이 반영되어 굴절된 유리라는 인식도 확산하였다.

    따라서 아카이브는 더 많은 기억의 지층들을 포괄해야 하며, 이러한 지층들의 시간성과 사회적 의미를 분석하는, 이른바 ‘기억의 층서학’이 동원되어야 한다. 층서학은 지층의 분포와 상태, 화석 등을 연구하여, 지층의 시간적·공간적 관계와 발달사를 밝히는 학문이다. 과거에 대한 해석이 담긴 다양한 기억과 서사들을 기록이라는 물질을 통해 관리하고, 기록집합체의 형성 과정과 구조, 기록 간의 관계, 기록과 당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기록의 의미를 분석한다는 점에서 기록 활동은 기억에 대한 층서학적 접근이라고 부를 수 있다.

  • 완료되지 않는
    과거에 대한 해석

  • 아카이브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과거에 대한 미세한 기억의 지층들을 찾아내는 임무를 자임해야 한다. 시대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지금의 우리 사회가 중시하는 가치에 비추어 과거에 대한 또 다른 기억, 잊혔던 기억을 찾는 것이다. 누구의 기억, 어떤 기록을 수집할지를 결정하는 데에는 과거에 대한 현재의 해석이 반영된다.

    1980년에 채택된 캐나다의 ‘토털 아카이브’ 정책은 공공기록뿐 아니라 민간 영역의 기록, 개인기록을 포괄해야 캐나다의 역사를 완전히 담을 수 있다는 취지를 갖는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국가기록화 전략에 민간기록 수집이 포함된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토털 아카이브 정책이 결과적으로 원주민의 역사를 배제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토털 아카이브가 원주민 강제 이주 및 학살의 역사가 지워진 캐나다의 국가 서사를 쓰는 데에 이바지했다는 것이다. 기록학자들은 캐나다의 포괄적인 서사를 생성한다는 ‘고귀한 꿈’에 가리어진 ‘비천한 이야기들’을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아카이브에는 도달해야 할 하나의 과거, 완결 지을 수 있는 하나의 해석은 없다. 해석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과거를 해석하는 현재는 늘 새롭게 도착하고, 과거와 현재 사이에는 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기록에 대한 지속적이고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는 이러한 주장이 기록의 의미 해체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 기록학자인 테리 쿡은 기록이 ‘행위’와 ‘사실’이 온전히 담기는 틀이 아니며 매개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구성물이자 문화적 상징물이라고 주장했지만, 그 어느 것도 진실은 아니라거나 모든 것이 “상대주의의 바다에서 표류”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텍스트의 내용보다는 맥락을, 기록유산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권력관계를, 그리고 기록의 구조와 시스템, 업무 과정을 통해 파악되는 서사를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 열린 서사 만들기

  • 올해는 광복 80주년이다. 격변과 불안의 시기를 고속으로 건너온 우리 사회에는 공적 활동의 자초지종을 기록화한 아카이브뿐 아니라 다양한 주체들의, 과거의 경험에 대한 기억이 축적된 아카이브들이 필요하다. 기록은 과거를 기억하는 방법이다. 우리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는지는 우리의 정체성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과거의 시간이 만들어낸 다양한 기억의 지층을 포용하고 이해하는 것은 아키비스트들이 추구하는 핵심 가치이기도 하다.

    아카이브는 역사와 달리 하나의 플롯이 존재하는 폐쇄형 서사를 추구하지 않는다. 새로운 기록을 찾고, 새로운 해석이 추가될 수 있는 개방형 서사를 지향한다. 이를 통해 시민들은 오히려 부재한 기억, 공백의 서사들을 인식할 수 있다. 존재하는 기록을 통해 부재와 공백을 깨닫게 하는 것도 아카이브의 역할이다. 더 많은 기억과 서사가 발굴되길 고대하며.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