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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또 하나의 현대사

 

낮은 지붕들 사이, 계단은 높고 가파릅니다. 급한 경사에 길을 내고, 위태롭게 쌓은 축대 위에 지은 집들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입니다.
1945년 해방 후, 새로운 희망을 안고 서울로 모여든 사람들이 집을 지으며 형성된 마을.
이곳의 시계는 반세기 전, 그 시절에 멈춰 있는 듯합니다.

 


김윤자 (68세, 장수마을 주민)

(제가) 여기 올라온 지 현재로 50년이 넘었어요.
와서 보니까 여기가 허허벌판이에요. 허허벌판인데 낮에 남자 분들이 벽돌을 찍더라고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현재는 무허가인데 자기 집을 짓는다고 하는 거예요.
그때는 가로등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 달빛 아래에서 집을 짓는 거예요.
아궁이 하나 부엌 하나 방 하나 이렇게 살았지요.
(그때는) 다 방 한 칸에 살았어요. 두 칸 산 사람은 없었어요.

 

산등성이, 촘촘하게 들어선 집들은 지난 우리의 시간, 우리네 삶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1950년 6․25 전쟁
 

 


3년여에 걸친 전쟁은 나라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전쟁의 소용돌이, 그 중심에 있던 서울은 세 집 중 한 집이 파괴되었습니다.
서울과 부산으로 몰려든 피난민은 아슬아슬한 삶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누구의 땅인지도 모르는 곳에 나무판자 조각들을 모아 벽을 만들고 지붕에는 천막을 씌웠습니다.
얼기설기 지은 판잣집이 하나 둘 들어서며 곳곳에 판자촌이 형성됐습니다.
하루의 한 끼 때우기도 빠듯했던 시절, 판자촌 사람들은 부족한 살림살이와 일감을 나누며 고단한 하루하루를 버텨냈습니다.
부엌은커녕 화장실조차 없어 공동시설을 이용해야 했습니다. 겨울은 큰 시련이 되었습니다.
 

 


이철순 (77세, 이화동 주민)

지붕은 루삥(기름먹인종이)으로 만들었고 벽은 흙벽이라서 안에서 밖이 내다보일 정도로 엉성한 집에서 살았어요.
많이 추웠지요 그래서 만약에 방에다 물을 떠놓으면 다 얼고 그랬어요. 정말 힘들게 살았어요.

 

판자촌은 이내 도시의 산허리를 따라 번져갔고, 달동네라 불리는 곳이 속속 등장했습니다.
자신의 땅이 아닌 곳에 세워지는 무허가 판잣집과 달동네에 대해 정부는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삶에 꼭 필요한 공간, 집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무엇보다 시급했습니다.
 

 


적산가옥 - 1945년 해방 당시 한국 내에 있던 일본인 소유의 집
 

 


이에 정부는 급한 대로 외국의 도움을 받아 난민용 주택, 월동용 간이주택 등을 건설했고, 해방 직후 일본인들에게 몰수했던 적산가옥을 싼 가격에 국민에게 판매했습니다.
또한 부흥주택, 희망주택이라는 이름으로 소형주택도 지었습니다.
 

 


<1957년 2월 28일> 대한뉴스 이승만 대통령 후생주택시찰
 

 


흙벽돌로 쌓은 좁은 방에, 부엌 그리고 마루가 있는 작은 집이었지만 서민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2014년 12월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 2동 부흥주택촌
 

 

 


신미숙 (62세, 청량리2동 부흥주택촌 주민)

(그때는) 살기가 다 힘든 시절이었는데 그래도 판자촌보다는 이쪽이 훨씬 더 나으니까요.
여기는 그래도 다 벽돌로 (집을) 지었는데 그 쪽(판자촌)하고는 또 다르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선호 했어요 이쪽으로 오는 것을

 

 


1950년대 3대 기간산업 - 시멘트, 판유리, 비료
 

 


이후 정부는 해외원조를 받아 시멘트, 판유리 공장을 건설했고 1950년대 말 건축자재 생산이 늘어나면서 주택 건축은 한층 활기를 띄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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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62년.
대한민국 주택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5·16군사정변 직후 생활혁명이라는 이름아래, 군사정부가 현대적 주거형태의 상징으로 내세운 마포아파트입니다.
1961년 10월 착공을 시작해 1년여 만에 6층, 6개동 규모로 450가구가 첫 선을 보인 마포아파트. 공원과 놀이터 등 공공시설을 갖춘,
오늘날 단지 개념의 최초 ‘아파트촌’이었습니다.
 

 


김기웅 (73세, 마포아파트 주민)

큰 변화로 봐야죠. 사회적으로 그렇고. 단독주택에서 집단거주 형태로 바뀌는 과정이니까
우리나라의 최초의 아파트니까 좀 특이하다해서 일부러 보러 오는 사람도 있었고

 

 


회현동 미쿠니아파트 (1930년)
충정로 유림아파트 (1930년)
 

 


사실 아파트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부터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당시 아파트는 2-3층 규모의 단독 건물로 대부분 기숙사나 사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종암아파트 (1957년)
개명아파트 (1959년)
 

 


전쟁 후, 국내기업이 독자적으로 건축한 아파트가 등장했지만, 1960년 서울에서도 아파트는 삼백여 호에 불과할 뿐.
높이 쌓아놓은 상자 같은 집은 우리에겐 여전히 낯선 공간이었습니다. 마포아파트 역시 처음부터 인기를 끌지는 못했습니다.
주부들은 김칫독과 된장독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고민했습니다.
 

 


영화 ‘말띠 신부’ (1966년)
 

 


하지만 아파트의 서구적 구조는 점차 주부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습니다.
욕조와 세면대, 변기를 한 공간에 둔 욕실은 물론, 입식 조리대를 갖춘 부엌은 재래식 부엌과 달리 허리를 굽히지 않고 음식을 조리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시 성북구 삼선동
 

 


변화의 바람은 단독 주택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건축업자들은, 개량한옥, 도시형한옥을 대신해 집장사를 목적으로 서양식 집, 양옥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서 삼각형 모양의 지붕을 얹은 집은 서구의 신전처럼 보인다 해 ‘불란서 주택’이라 불렀습니다.
 

 


새마을운동
 

 


농촌 역시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입식부엌과 실내 욕실을 들여 생활의 풍경을 바꿔놓았습니다. 1970년에 시작한 새마을 운동의 일환이었습니다.
 

 


이병화 (65세, 경기도 용인)

방안에 화장실이 있었다는 것은 농촌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고
부엌하고 방 높이가 같았다는 것 그게 이제 대단했고 아이들 공부할 수 있는 독립된 공간을
마련해줬던 것 그리고 작지만 테이블과 소파가 있었다는 것 그런 것들은 과거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그 즈음 공간을 부르는 이름도 달라졌습니다.
부엌은 주방으로, 마루는 거실로, 변소를 화장실로 바꿔 부르며 좀 더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서양식의 주택 구조가 그대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공기를 데우는 라디에이터 방식은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까지 가장 흔한 것은 연탄아궁이를 사용한 온돌이었습니다.
도시에서 나무연료 사용이 금지되고, 석탄생산이 늘어나면서 연탄산업은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구공탄, 구멍탄으로 불리던 연탄은 화력이 좋고 다루기도 편리해 주부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습니다.
사람들은 재래식 아궁이를 연탄아궁이로 교체하거나 바퀴 달린 연탄화덕을 구들장 밑으로 밀어 넣어 난방을 했습니다.
 

하지만 구들장에서 새어나온 연탄가스가 방바닥 틈으로 스며들어 많은 이들이 연탄가스에 중독되거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마포아파트 연탄보일러 구조
 

 


이에 등장한 것이 연탄보일러.
뜨거운 물이 파이프를 돌아 순환하는 보일러기술 덕분에 바닥 난방은 물론 따로 물을 데우지 않아도 집안에서 온수를 쓸 수 있게 됐습니다.
연탄은 김장과 함께 월동준비의 주요 품목이 되었습니다.
 

 


김인순 (82세,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

좋았어요. 그때는 연탄 때니까, 장작을 대지 않으니까
나무 걱정 하지 않고 연탄 깨끗하고 연탄불 때는 게 편하고 좀 낫고
하루 종일 펴 있으니까 불이. 아주 호강이었어요.

 

보일러 난방기술로 재래식 아궁이로는 어려웠던 2층 난방이 쉬워지고, 철근콘크리트 사용이 확대되면서 2층 집이 점차 늘어갔습니다.
 

한편, 대도시의 주택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정부는 산중턱, 무허가 주택을 허물고 시민아파트를 건설했습니다.
작은 평수, 공동화장실 등 최소 비용으로 건설된 아파트였습니다.
그러나 단기간에 서둘러 세워진 아파트는 비리로 얼룩져 있었고, 이내 참사로 이어졌습니다.
1970년 4월. 마포구 창전동의 5층 건물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수십 명의 사망자와 부상자를 낸 와우시민아파트 붕괴사고.
준공된 지 불과 4개월 만의 일이었습니다.
 

 


조천용 기자 (前 동아일보기자)

세상에 아파트가 저럴 수가 있나 그 양쪽 동은 있는데, 가운데 15동만 그대로 주저앉았어요.
주민들 이야기 들어보면 입주하자마자 벽에 금이 간 곳이 많았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거기에 대한 건의를 많이 하고 그랬었는데 그게 이제 시정되지 않고 그대로 혹시나, 혹시나 했겠죠

 

자신들을 위한 집을 기대하고 있었던 서민들에겐 충격일 수밖에 없었던 와우아파트 붕괴사고.
이로써 시민아파트 건설 사업은 중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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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TV앞에 앉은 이들의 가슴을 떨리게 한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TV음성)

준비하시고~ 쏘세요!

 

 


주택복권 추첨 프로그램
 

 


국내 복권의 대명사였던 주택복권 추첨방송이었습니다.
한국주택은행이 1969년 9월부터 발행한 주택복권은 무주택 국가유공자와 파월장병의 주택마련 기금조성이 목적이었습니다.
장당 100원에, 당첨금은 300만원! 대도시의 중소규모 집값이 약 200만원이었던 시절, 주택복권은 내 집 마련을 향한 소박한 기대였습니다.
 

 


문태조 (69세, 복권수집가)

인기 대단했죠. 대단했어요 그 때는 배고픈 설움도 있었고 집 마련하기도 힘들었고
서민들이 집 마련하기 위해서 복권 한 장이라도 더 사볼까 싶어서 그런 난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도시에서 방 한 칸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의류, 신발 등 경공업 제품의 수출이 크게 증가하면서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1970년대 중반은 철강, 조선, 자동차 등 중화학공업의 성장에 힘입어 수출 역사의 새 전기를 맞은 시기였습니다.
 

 


1977년 수출 100억 불 달성
 

 


국내 건설업체들도 막대한 오일달러를 축적한 중동시장에 진출해 외화를 벌어들였고, 국민소득 또한 높아졌습니다.
 

 


1977년 국민소득 1,000달러 달성
 

 


하지만 여유자금이 부동산에 몰리면서 눈만 뜨면 집값이 치솟았습니다.
특히 복부인이라 불리며 아파트 사재기로 돈을 번 부유층 이야기가 대중매체를 장식하면서 투기바람을 부추겼습니다. 

1977년 봄. 아파트 공개추첨 장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습니다.
연일 엄청난 분양경쟁률을 보이며 100채 이상을 한꺼번에 신청한 사람까지 생겨났습니다.
정작 집이 필요한 사람들에겐 기회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77년 주택청약제도가 마련됐습니다.
주택청약제도는 청약통장에 일정기간, 일정금액을 낸 세대주에게 하나의 분양신청권을 주는 것으로, 무주택 세대주에게는 공공자금으로 지은 아파트의 일 순위 청약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김선홍 (59세, 베이비부머 세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아서 내 집 마련을 하는 게 개인 재무의 최대 목표였고, 꿈이었죠.
청약제도에 가입하는 게 우선이었죠. 그래서 그거를 통해서 청약부금을 붓고 아파트 청약을 하는 게 아파트를, 내 집을 장만하는 첫 걸음이었습니다.

 

빠듯한 살림이었지만, 사람들은 꼬박 꼬박 청약 통장을 채우며 내 집 마련의 꿈을 키워갔습니다.
 

 


토지구획정리사업
 

 


집이 부족했던 상황이지만, 당시 산업화에 모든 힘을 기울였던 정부로서는 주택건설에 많은 재원을 투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에 직접 집을 지어 공급하기보다는 사람들이 집을 지을 수 있는 택지를 조성하는데 노력했습니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이 제도는 도로와 수도관 등 기반시설의 설치비용을 토지소유자들의 땅을 일부 팔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부는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었으며 토지소유주들은 기반시설로 땅값이 올라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택지가 조성되면, 사람들은 그 땅 위에 집을 지었고, 많은 주택이 공급되면서 도시는 점차 확장되었습니다.
 

그러나 도시재개발과 주택지 조성사업은 무허가 판자촌 사람들에게는 큰 고통이 되기도 했습니다. 낡고 불편한 집이었지만, 그 집마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1970년 경기도 광주 대단지
1977년 경기도 시흥2동
 

 


하루아침에 터전을 잃은 철거민들은 기반시설을 갖추지 못한 도심 밖, 이주정착지로 밀려나거나 도시 내 또 다른 곳에 무허가 주택을 지어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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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가 고도성장의 궤도에 오르고, 국민들의 소득수준이 높아지자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고자 하는 욕구도 높아졌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 맞춰 기업들이 주택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며 아파트 단지 건설은 급성장을 가져왔습니다.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개통
 

 


더욱이 전국 1일 생활권시대를 연 경부고속도로는 지역개발과 함께 대도시 인구집중을 더욱 가속화했고,
서울에는 경부고속도로를 잇는 제3한강교가 놓이며 강남을 비롯한 서울근교 개발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아파트 지구로 지정된 반포 잠실 압구정 등 강남 지역에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건설됐습니다.
 

 


1978년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동
1982년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
1983년 서울시 송파구 잠실동
 

 


아파트는 허허벌판에 세워졌지만 단지 내에 각종 편의 시설을 들여 편리한 생활환경을 갖춰놓았습니다.
그 만큼 아파트 가격은 상승했고, 아파트 단지에 산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중산층으로 편입한다는 의미로 통했습니다.
강남개발로 아파트 시대를 이끈 기업들은 1980년대에 도시의 낙후 지역재개발에 참여해 산동네를 아파트 단지로 변화시켜갔습니다.
 

한편에서는 영세건축업자들이 도시의 단독주택을 허물고 다세대, 다가구 주택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자가용이 늘어나면서 주차 문제가 발생하는 등 크고 작은 문제를 낳기도 했지만, 아파트보다 저렴한 다세대, 다가구 주택은 아파트와 함께 도시의 모습을 바꿔갔습니다.
 

1980년대, 한국경제는 유래 없는 호황을 누렸습니다.
석유가격, 이자율, 원화가치가 모두 낮아져 한국제품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얻게 되자 수출이 크게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개최를 준비하면서 선진국 진입을 향한 기대도 높아졌습니다.
 

한편에선 민주화가 빠르게 진행되었고, 도시 재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집과 주거환경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국가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국가는 주택개발정책 등을 통하여 모든 국민이 쾌적한 주거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 1987년 개정 헌법 제35조 제3항 - 

 

 


1955년~1963년생 베이비부머 세대
 

 


그러나 주택문제는 여전히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더욱이 전쟁 후, 출산율이 급격하게 증가한 시기에 태어난 일명 베이비부머 세대가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자 주택수요는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값과 전세금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부동산 투기도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집값 상승률
3년간 약 56% 상승
1982년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
1989년 7월을 기준으로 1년 6개월 동안 전국 전세금 28.3% 상승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이에 노태우 정부는 200만호 건설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주택 200만호는 1987년 기준, 국내 총 주택 수의 30%가 넘는 규모.
5년이라는 단기간 내 엄청난 주택 물량을 공급하기 위해 먼저, 집 없는 서민들을 위한 영구임대 주택이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수도권에 대규모 신도시 개발이 시작됐습니다.
 

보다 많은 집을 짓기 위한 계획도시에는 공동주택, 특히 아파트가 대거 건설되며 고층 아파트가 숲을 이룬 새로운 도시가 만들어졌습니다.
서울과 신도시를 잇는 도로가 건설됐고 광역버스와 함께 지하철 노선이 연장됐습니다.
 

수도권 집중화 등의 여러 문제를 낳았지만, 삶의 터전, 집을 짓기 위한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신미숙 (62세, 청량2동 부흥주택촌 주민)

집이란 우리 시절에는 꿈 이었던 거 같아요.

 

 


송배헌 (63세, 이화동 주민)

부모가 자식한테 집 하나 마련해 주고 가면 ‘자기임무를 다했다, 내 할 일을 다 했다’

 

 


김선홍 (59세, 베이비부머 세대)

집안에 어떤 사태에 대비한 보루, 그리고 노후 보장이었습니다.

 

집은 우리에게 땀과 열정, 그리고 간절한 꿈이었습니다.
전쟁과 산업화, 그 압축성장의 과정 속에 높고 빠르게 지어진 집.
집은 숨 가쁘게 지어지며 때론 크고 작은 고통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고단한 삶의 보금자리로, 점차 편리한 기능을 갖추며 우리네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렇게 집은 급변하는 대한민국의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