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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주도공업화

 


제프리 프랑켈 교수 / 하버드대 정책대학원, 캐네디스쿨

한국의 경제적 기적은 가장 좋은 예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때는 가난했던 나라에서 시장경제체계가 잘 작동해 한 생애 주기 안에 고소득 국가들에 버금가는 생활 수준을 달성했지요. 고성장을 이룬 다른 나라들도 있지만 한국이 가장 뛰어난 예일 겁니다.

<세계 석학이 본 대한민국 경제 100년> KBS

 

 

 

불과 50여년 전만해도 가난한 아프리카 나라들과 다를 바 없었던 대한민국의 경제 수준!
과연, 지난 50여 년 간, 대한민국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던 것일까?
대한민국 경제개발의 역사, 그 발자취를 되돌아본다!
 


1
 


“1945년 8월 15일. 36년 간의 일제 쇠사슬이 끊어지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세계만방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광복 3년 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체제를 표방하는 서방진영의 일원으로 정부를 수립하였다.
1945년 이후 동서냉전 초기 시대였던 당시, 대다수 신생 독립국들은 사유재산제를 부정한 공산국이 되거나 국영부문이 큰 경제체제를 택했고, 선진 자본주의국들과의 교역을 완전히 끊거나, 최소화하는 추세였다.
 

그러나 시장경제체제를 선택한 대한민국은 서구 자본주의국가들로부터 선진 문명과 기술을 손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게다가 시장경제체제는 한국인들의 자조정신까지 북돋웠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 월남 기술자, 중동 건설 근로자의 예처럼 한국인들은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다.
이처럼 대한민국이 선택한 경제체제는 좋았다. 그러나 그 출발점에서 대한민국은 자립이 불가능할 정도로 너무 가난했다.
 

 


신호철 (69세) / 월남참전용사

먹을 게 없어서 산에 가서 칡뿌리는 캐다먹든가 또는 막자라는 새싹을 뜯어먹든가 그야말로 빈곤에 허덕였죠. 하루 세끼는 호사스러운거고 하루 한 두 끼를 연명하는 게 태반이었고..

 


말라서 갈퀴같이 앙상한 손을 벌리며 외마디 절규로 부르짖었던 ‘Hello give me’
신트림 나는 입으로 소리쳤던 'Hello give me'

 

 

6.25전쟁 휴전 후 대외 원조 없이는 살 수가 없었던 대한민국은, 1945년부터 1961년간 미국으로부터 총 31억 달러의 막대한 원조를 제공받아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고, 경제를 재건했다.
그 밑거름으로 소비재공업, 특히 ‘삼백공업’이라 불리는 면방직업, 제분업, 제당업이 발전해 한국 경제는 1954년부터 1960년간 연 4.9%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원조에 의지할 수만은 없었다.
 

미국이 원조를 줄이려 했기 때문에 하루빨리 자립 능력을 키워야 했다. 1950년대 후반, 미 원조당국은 한국 정부에 장기 경제개발계획안을 작성하라고 요청했다.
 

이에, 이승만 정부 부흥부의 김현철-송인상 장관, 차균희 경제기획관, 이기홍 기획과장, 재무부 이한빈 예산국장 등의 신진 관료들이 한국 경제의 자립 방안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58년 4월, 부흥부 산하에 각계의 전문가들로 산업개발위원회를 조직, 최초의 체계적 경제 계획,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을 작성한다.
 

이 계획엔 GNP 연 5.2% 성장을 목표로 제조업, 건설업, 광업 등 2차 산업의 집중 육성 의지가 담겼다. 이 계획안이 1960년 4월 발표되었으나, 곧이어 발발한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폐기되었다.
4.19혁명 후 집권한 민주당 정부도 경제 제1주의를 표방한 바, 이전의 3개년 계획안을 참고해 1961년 5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5.16군사정변으로 무산되었다.
 


2

 


박정희 대한민국 5~9대 대통령
     “... 우리의 적은 빈곤과 부정부패와 공산주의입니다. 나는 이것을 우리의 3대 공적으로 생각합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가 이끄는 일단의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그들은 군사혁명위원회 명의로 혁명공약을 발표했다.
정변 직후 군사정부는 지도받는 자본주의, 계도(啓導) 자본주의를 제창했다. 국가의 개입, 통제 방침은 분명했으나 민간 기업에 의한 경제 운영이라는 중심 원칙은 흔들지 않았다. 군사정부는 대기업주들이 경제건설에 적극 나설 것을 요청했다.
 

부정축재 혐의를 받은 기업인들은 ‘경제재건촉진회’를 구성했다. 오늘날 재계의 대표 단체 중 하나인 ‘전국경제인연합회’ 출발이었다. 군사정부는 이 기업인들에게 제철소, 비료공장 등 국가 기간산업 공장의 건설을 나누어 맡겼다.
 

이어 경제기획, 예산부터 외자도입까지 결정권을 가진 경제기획원을 설립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군사정부는 부정축재금의 환수라는 명목으로 시중은행을 국유화했다. 공금융시장까지 장악한 것이다. 군사정부는 경제개발계획 수립도 서둘렀다.
 

1962년 1월, 제1차 5개년계획안을 발표했다. 목표는 5개년 연평균 7.1%의 성장! 일본의 소득배증계획을 본떠서 10년 후 국민소득을 2배로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전 3년간 연평균 2.3% 성장한 국내 상황을 고려하면 매우 과도한 목표였다.
 

이 계획을 위해 그해 6월, 내자 동원책을 전격 단행했다.
‘10대 1 화폐개혁’!!
새 화폐로 바꾸려고 내놓는 거액의 옛 화폐를 산업투자자금으로 쓸 계획이었다.
그러나! 거액의 옛 화폐는 나오지 않아 이 시도는 실패했다. 외화 자금 조달 역시 쉽지 않았다. 외화수입원도 없고, 대외신인도도 낮으니 차관을 얻을 길이 없었다.
미국은 목표 성장률을 낮추고 종합제철소와 같이 과도한 투자계획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당초의 1차 5개년계획안은 실패로 끝났다. 애초부터 한국과는 맞지 않는, 현실성 없는 계획이었다.
 

 


박이택 교수 / 고려대 경제연구소

군사정권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상당히 높은 수준의 성장목표를 추구를 했습니다. 그래서 7.1% 정도의 성장목표를 추구를 했는데 내자라던가 외자라던가 모두 동원하기 상당히 어려운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미 1962년 12월이 되면 수정을 해야되겠다 하는 논의가 나오게 된 거고, 그래서 다양한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 속에서 64년 2월에 보완계획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죠.

 

 

결국 현실적인 실행이 가능하도록 계획을 변경하거나, 새 길을 찾아야 했다.
 


3 


정부는 일단 계획을 대폭 축소하여, 1964년 2월 제1차 5개년계획의 보완계획을 내놓았다. 목표 성장률을 7%에서 5%로 낮췄고, 사업 수도 대폭 줄였다.
 

3개월 후인 5월에는 원화 가치를 대폭 절하했다. 1달러 환율을 130원에서 255원으로 약 2배 인상한 것!
이는 미국의 시장자유화 요구에 따라 환율을 현실화한 것일 뿐, 수출주도공업화 전략의 일환으로서 수출 증대를 위해 환율을 올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새 길이 열리고 있었다. 1962년부터 공산품 수출이 증가하기 시작한 것. 주요 수출 항목은 양철, 합판, 의류 등이었다.
경제계가 정부보다 먼저, 수출 시장을 찾아 활발히 움직인 것이다.
 

대한상의는 1963년 2월과 6월 일본과 홍콩 등지로 보세가공무역 조사단을 파견했고, 한국경제인협회는 3월, 수출산업촉진위원회를 만들어 보세가공업 조사 등을 목적으로 수출산업조사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그들은 새 수출 공업을 물색하고, 재일교포 기업인들에게 모국 투자를 요청했으며, 돌아와서는 정부에 재일교포 기업인들이 투자할 경공업 수출산업단지를 서울 근교에 만들어 달라고 건의했다.
 

천우사의 전택보와 같은 기업가들도 각종 수출진흥책을 정부에 건의했다. 정부 역시, 수출 증가에 주목했다.
박정희는 이미 1964년 1월 연두교서에서 근래 공산품 수출의 증가를 특기할만한 발전으로 언급한 바 있었다.
 

1964년 5월, 새 경제팀이 출범했다. 정일권 총리 이하 이른바 한일회담 돌격 내각에 포함된 장기영 부총리가 그 주역. 장기영은 ‘왕초’라는 별명만큼 강한 보스 기질과 탁월한 추진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과거 일본을 왕래하면서 수출 진흥의 가능성을 확인한 그는 수출주도공업화로 경제 부흥의 가닥을 잡았다.
 

 


양윤세 / 1960년대 기획원 외자총괄과장, 투자진흥관

장기영 부총리 하게 되면 단 한마디로 보기 드문 노력형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추진력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했습니다. 장 부총리가 내각에 들어와서는 부총리로서 경제기획원이 할 수 있는 영역이 확 넓어졌어요. 국제적인 문제에서도 상당히 시야를 넓혔어요. 국제무대를 퍼뜨려놔서 국제협력을 일으키고 이런 활동을 했기 때문에 경제기획원의 본연의 모습이 장기영 부총리가 와서 드러났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절에 장기영씨 이상 적절한 사람은 생각할 수가 없었어요.

 


황병태 / 1960년대 기획원 공공차관과장, 경제협력국장

장기영 씨는요, 자기가 말하는 것처럼 25시의 사람입니다. 남보다 1시간을 더 쓰는 사람이에요. 늘 잠을 안 자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불도저식으로 가니까 박대통령이랑 콤비가 맞은 거예요. 사실은 우리나라요. 초창기 경제개발과정은 장기영 씨 플러스 박대통령이죠. 박대통령 혼자 한 것이 아닙니다. 장기영이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박대통력이 개발철학을 가지게 되지 않았나 이리 보는 겁니다.

 

 

장기영 팀내 상공부의 박충훈 장관은 수출제일주의를 표방했으며, 김정렴 차관은 1950년대 일본의 경제부흥과정을 참고하여 의류 등의 가공무역을 진흥하는 데 주안을 두었다.
1964년..드디어 수출이 사상 최초로 1억 달러를 넘어섰다. 박정희 정부는 이를 기념해 11월 30일을 수출의 날로 지정했다.
 

 


1965년 1월 대통령 연두교서
  ‘지난 수년 내 정부와 민간이 노력한 결과 수출은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1965년 1월,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증산, 수출, 건설을 국정의 3대 목표로 발표했다.
이처럼 1965년 초 정부는 수출을 국정의 중심 목표로 격상시켰다. 수출제일주의, 수출입국이 널리 제창되었다. 정부는 저리의 수출금융 제공, 수출용 원부자재 관세의 감면, 우수 수출업자에 대한 포상과 지원을 했다.
 

1965년 3월에는 첫 번째 수출공업단지로서 구로공단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2년 전 기업인들의 일본 시찰 후 건의가 구현된 것이다. 1973년까지 총 60만평의 3개 공업단지가 만들어져 섬유 봉제, 기계 전자 등의 많은 업체가 입주하였다. 종업자 수는 1978년 11만 4천명에 달할 정도였다.
 

1965년 2월부턴,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가 매월 개최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첫 회의부터 1979년 사망할 때까지 거의 매회 참석, 수출을 독려했다. 이처럼 1964년 하반기에 박정희 정부는 수출에 최우선을 둔 공업화 전략을 택하였다. 민간이 먼저 움직이고 성과가 나오자 정부가 그를 중심 정책으로 만든 것이다.
 

 


송의영 교수 / 서강대 경제대학원

60년대 초반에 민간주도의 수출공업화가 시작됐고 정부는 이걸 포착해서 일종의 굳히기 작전으로 들어가는 걸로 파악을 하고 있습니다. 관이 했던 중요한 역할은 매우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정책을, 종합계획을 세워서 그것을 잘 수행했던 것이고, 정부 특히 이 최고 정치 수뇌부는 수출공업화를 국시로 삼아서 분위기를 유지했다는 것에서 정부하고 정치가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전략은 후진국 경제개발사에 일찍이 없던 전략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그것이 성공할지도 불투명했다.
 

 


드와이트 퍼킨스 / 전 하버드대 아시아센터 소장

많은 사람들이 한국은 분명히 실패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당시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3세계 국가는 수입 대체전략을 시행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 때는 아무도 한국의 수출주도 전략을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세계 석학이 본 대한민국 경제 100년> KBS

 

 

 

훗날 한국의 공업화가 성공하자 경제학자들은 이를 ‘수출주도공업화’, ‘수출지향공업화’로 명명하였다.
 


4 


한국의 공산품 수출이 급증한 것은 고속 성장하던 세계경제의 흐름을 탄 덕분이었다. 제2차대전이 끝난 후부터 제1차 석유파동이 일어난 1973년까지 서구 선진국을 중심으로 세계경제는 사상 전례가 없는 고도성장을 했다.
1950년부터 1973년까지 세계경제의 연평균 성장률은 4.9%나 되었다. 이는 1820~1950년의 연평균 성장률 1.6%보다 훨씬 높았다.
 

소득과 임금이 크게 상승한 선진국에선 노동집약적 경공업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자연스럽게 의류, 완구, 가발, 신발, 전자 등 단순 가공 경공업들은 노임이 싼 개발도상국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양질의 노동력을 가진 개발도상국은 이 경공업을 유치해 선진국에 공산품을 수출할 기회를 잡았다.
 

다수의 교육받은 인력을 가진 대한민국이 바로 그런 나라였다. 1960년대 초 한국에는 초등 교육 이상을 마치고도 일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로 넘쳤다.
이들 중 양순하며 인내심 강하고 가족을 위해 희생할 자세가 되어 있는 10대 후반의 나이 어린 여성들이 가장 먼저 섬유 의류, 가발 등의 제조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이런 세계적 조류 속에서 한국이 경공업 공산품 수출을 중심으로 경제개발 전략을 바꾼 것은 참으로 적절한 선택이었다.
 

특히 1965년의 한일국교정상화는 이 새 전략을 뒷받침하는데 일조했다.
중화학공업화에 따라 부품 등 중간재와 기계 등 자본재의 수출국이 된 일본. 한국은 일본에서 들여온 기계, 부품을 조립 가공해 경공업품을 만들고, 그를 미국 등 선진국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송의영 교수 / 서강대 경제대학원

1965년 국교정상화는 많은 논란이 있지만 이렇게 선진국으로부터 특히 일본으로부터 자본재와 기술, 금융자본을 수입해서 그것을 통해서 경제성장과 수출의 기반을 다지고 그것을 통해서 다시 제3국으로 수출하는 국제분업 구조를 앞당겼다는 것에 있어서 경제발전사상 굉장히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5 


수출은 해마다 급속도로 증가했다. 1961년 4,090만 달러였던 수출액은 18년이 지난 1979년, 151억 달러로 368배 증가했다. 연평균 약 40%이라는 경이로운 증가율이다.
1960년대에는 섬유의류, 합판, 가발 등 가공 경공업품이 1970년대에는 섬유, 전자, 조선 등의 제품이 주요 수출품이었다.
 

 

먼저 섬유 의류. 의류와 직물 수출액은 1965년 5,760만 달러였으나 1970년에는 3억3천만 달러로 급증했다. 이는 전체 수출의 40%에 달한 액수다.
초기에는 미가공 섬유, 직물이 주로 수출되었으나, 곧 의류 완제품이 주요 수출품이 되었다. 특히 스웨터 등 메리야스제품의 수출이 활발했다.
  

수출 품목의 또 다른 공신인 합판 역시 노동집약적 품목. 전후 복구수요가 일단락되자 목재업자들은 일본의 합판가공업을 참고하여 합판 가공에서 새 활로를 찾았다. 1970년경 합판 수출은 수출액의 10%를 넘었다.
 

 


장문영 부회장 / 합판보드협회

우리가 자원도 없고 교육받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노동집약 산업을 한 거거든요. 그 중의 하나가 합판 공업인데 그 뿌리가 일제 때 1930년대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놨던 공장입니다. 1940년대에 부산 동명목재 등 아주 작은 규모지만 합판을 만들던 기초가 있었어요. 빨리 그것을 흡수할 수 있는 인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기술인력도 그렇고 고급인력들이 있고 하다 보니까 합판이 상당히 급성장을 합니다.

 

 


“머리카락 팔아요. 어머니들 머리카락 팔아요”

 

 

쪽진 머리를 삭둑 잘라내 학비를 내고, 끼니를 해결하던 시절..
가발 제조는 우리나라 여성의 섬세한 손재주와 풍부한 노동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내에서 조달 가능한 원료라는 면에서 1960년대 전반 우리나라에 딱 맞는 업종이었다.
가발 수출을 본격화한 이는 서울통상의 사장 최준규다.
 

 


1965년 초여름 박충훈 상공 장관은 상공회의소에서 상공인과의 면담을 가졌다. 첫 번째 면담자인 서울통상(주)의 최준규 사장이 염색한 머리카락 한 다발을 내보였다. 가발을 만들어 수출하겠으니 원모 수출을 금지해달라는 건의였다. 마침 베트남전을 벌이던 미국이 북베트남을 지원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산 원모로 만든 홍콩․일본산 가발에 대해 일시 수입금지 조치를 취하자 한국산 가발은 미국 시장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했다. 1964년 1만4천 달러에 불과했던 가발 수출액은 1965년 155만 달러, 1966년 1,062만 달러를 거쳐 1970년에는 9,357만 달러가 되었다.

『한국형 경제건설 2』, 오원철 저

 

 

 

이처럼 가발 수출에는 운도 따랐다. 구로공단의 서울통상은 천 여 명 여공을 거느린 대규모 가발공장. 가발 외에 완구, 스웨터 수출도 겸했던 서울통상은 1970년 수출액 2위를 기록했고, 사장 최준규는 재벌기업가들을 제치고 1971년 개인종합소득세 납세 1위에 올랐다.
 

이렇듯 1970년 총 수출액의 12%를 차지하며 3번째 상위 수출 품목이었던 대한민국 가발은 미국 시장에서 홍콩 가발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지속적 경제성장으로 대한민국의 임금도 상승하자 가발 제조업은 1970년대 사양되었다.
수출품목 1, 2, 3위는 의류, 합판, 가발. 이처럼 초기의 대한민국 수출품은 보잘 것 없었다.
 

 


오원철 / 박정희 정부 청와대 국무수석

내가 국장할 때니까 64,5년도일거에요. 우리가 수출하는 것이 와이셔츠 같은 것인데 우리나라 물건들을 어디서 파는지 보니까 우리나라 수원시장쯤 될까 창원시장 그 정도로 조그만 시장 바깥에 있어요. 일층 이층짜리 형편없는 집들이 쭉 나란히 있는 가게인데 안에 보니까 전등도 안 켜서 깜깜해요. 문 바깥에다가 이만한 책상을 놨어요. 이 위에 쌓인 게 한국에서 수출된 와이셔츠인 거예요. (한국산 와이셔츠는)가게 안에 못 들어가요. 값이 싸서 한 개씩은 안팔아요. 한타(12개)씩. 우리 여공들이 그렇게 열심히 만들었는데 이렇게 푸대접을 받고 있나 생각했지요

 

 

그러나 공업화는 이처럼 시시한, 값싼 제품의 수출부터 시작하는 법이었다.
 

 


로버트 루카스 교수 / 노벨경제학상, 시카고대

섬유 산업은 일종의 시작점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가진 한국 제품은 야구 글로브였는데요. 미국에서 파는 좋은 글러브는 매우 비쌌지요. 그런데 어느 날 아주 저렴하면서도 손바느질로 잘 만든 한국산 야구 글러브를 사게 된 겁니다. 아마 어떤 여성이 가죽을 한 무더기 집에 가져가서 만들었겠지요. 그것이 처음 산업을 시작할 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세계 석학이 본 대한민국 경제 100년> KBS

 

 

 

한편 1960년대 후반 한국 기업은 월남 파병으로 열린 베트남에 들어가 운송하역 및 건설 시장에도 진출하였다.
 

파월기술자는 1965년 105명이었으나, 1966년부터 ‘월남 붐’이 일어, 1968년에 1만 5,571명이 되었다. 이들은 주로 크레인 하역 기사, 트럭 운전사였다. 물품군납, 건설용역, 파월기술자와 군인의 임금, 송금 등을 통해 1969년 한 해만 총 1억 8,73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같은 해 수출액 대비 30% 가까운 큰 금액이었다.
 

오늘날 운송 대기업 한진그룹. 월남 특수를 통해 급성장했다. 당시엔 한진상사로 월남 붐을 타고 1968년 2,670만 달러의 항만 하역 및 수송 용역 등으로 월남에서 총 1억 1천만 달러의 용역을 따내며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경공업품의 순조로운 수출은 저렴하면서도 양질의 노동력이 풍부했기에 가능했다.
1966년 한국의 근로자 시간당 임금은 필리핀, 태국, 대만의 절반에 불과할 정도로 낮았다.
하지만, 노동시간은 세계 최장 수준이었다. 1960년대 후반 선진국은 물론 동남아 국가까지도 노동시간이 주당 45시간 정도였던 반면, 한국은 그보다 10시간 많은 55시간을 넘나들었다.
 

당시 열악했던 근로조건을 대표했던 곳은 청계천 평화시장 피복 공장이었다. 영세 봉제업자에 고용된 재단사와 여공 재봉사들은 닭장처럼 좁고 더러운 작업환경에서 하루 12시간 이상 고된 노동에 종사하였다. 결국, 1970년 11월 13일.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의 봉제업체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22세 청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하는 일이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전태일이 대통령에게 보내려고 쓴 진정서
저는 피끓는 청년으로서, 이런 현실에 도전하는 재단사로서 도저히 이 참혹한 현실을 정신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1개월에 첫 주와 3 주, 이틀을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썬 아무리 강철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 버립니다.

 

 

그러나 그 무렵 근로자의 실질임금은 본격적으로 오르고 있었다. 실질임금은 1965년부터 1966년까지 연 5%의 상승 시동이 걸렸고, 1967년부터는 연평균 10%로 급상승하였다.
이는 한국이 높은 숙련과 기술을 쓰는 산업으로 빠르게 옮겨간 덕분이었다.
 

이처럼 1960, 70년대의 섬유공장은 빈민 출신의 재단사와 보조 노동자들이 빈곤의 수렁에서 탈출할 사다리의 첫 계단이자 한국이 오르기 시작한 경제발전 사다리의 첫 계단이었다.
 


6

 

경공업품 수출의 확대는 관련 공업의 발전을 가져왔다. 화학섬유산업이 그 대표다. 화학섬유는 1920~30년대에 처음 발명된 나일론, 폴리에스텔, 아크릴 등을 말한다.
나일론은 견사와, 폴리에스테르는 면사와, 아크릴은 모사와 각기 비슷한 특성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1950년대 말부터 수입한 나일론 실을 스트렛치 가공하여 직조한 양말이나 직물이 인기를 끌었다. 이에 새로운 사업기회를 찾던 기업인이 나일론사를 직접 생산하는 공장을 세웠다.
이어서 아크릴, 폴리에스터 공장도 속속 들어섰다.
 

1957년 이원만, 이원천 형제가 설립한 나일론사 가공업체 한국나일론(주)은 1963년 8월 대구에 차관으로 나일론F사 제조공장을 세웠다. 그것이 한국 화섬 산업의 출발이자, 코오롱그룹의 출발이었다.
코오롱에 이어, 한일나일론(1964년)과 동양나일론(1965년)이 나일론사 생산을 시작했다. 이어서 한일합섬(1967년)과 동양합섬(1967년)이 아크릴사 생산을 시작했고, 1969년에는 선경합섬이 폴리에스테르사 생산을 시작했다. 이 업체들의 외자 도입에 대해 정부와 은행이 지급보증을 해주었고, 부족한 내자도 은행이 융자해 주었다. 훗날 이 섬유기업들은 재벌이라 불리는 대기업집단으로 발전하였다.
 

 


이상철 교수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초기에는 국내에서 수입하던 것을 국내생산으로 대체한다라고 하는 그런 목표를 가지고서 화학섬유에 대한 정책들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규모를 늘릴 필요가 있었는데요. 초기에는 수입대체로 시작했지만 규모를 늘리는 과정에서 그 늘렸던 규모자체가 국내의 내수 수요를 충족하고 넘어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초과되는 부분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이슈가 되었기 때문에 화학섬유의 생산자체가 새로운 형태로 변화되는 그런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노동집약적 산업이 활짝 꽃을 핀 것은 일일이 수작업으로 부품을 조립하는 전자공업에서였다. 초기, 한국의 전자공업은 외국산 부품으로 가전제품을 조립하는 것으로 출발했다.
 

바로 1959년 현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의 라디오. 플라스틱 제조로 크게 히트한 락희화학의 사장 구인회는 1958년 초 새로운 사업거리로 라디오 국산화를 선택하였다.
구인회는 서독인 기술자를 초빙하여 김해수 등 한국인 기술자들이 라디오 조립을 배우도록 했다. 1959년 11월 일본 산요전기의 진공관을 비롯한 외국산 부품을 단순 조립한 첫 제품을 생산 출고하였다.
이후, 구인회는 전화교환기와 흑백TV도 조립 생산하였다.
 

이렇게 민간업체 주도로 전자제품의 국산화가 시작되자 정부도 적극적으로 전자공업 육성에 적극 나섰다. 정부는 흐름에 맞춰 전자공업진흥법(1969.1) 등 전자산업 육성계획을 쏟아냈다.
저렴하면서도 양질의 노동력에 반한 미국과 일본의 전자업체들이 부품 생산을 위해 단독투자나 합작투자 형태로 대거 진출해 왔다. 한국 기업도 전자공업에 속속 진출하였다. 국내 최대 기업집단이던 삼성은 1969년 TV와 진공관 등 생산품 전량 수출을 조건으로 해서 전자공업에 진출했다.
 

정부가 전자공업에 대한 지원책으로 1970년대 초에 경북 구미에 대규모 산업단지를 건설함으로서, 많은 업체들이 입주했다. 이를 계기로 전기전자제품의 수출이 비약적으로 늘었다.
초기 수출은 콘덴서나 트랜지스터 등 전자부품 위주였으나, 나중에는 흑백TV와 녹음기 등 가전 완제품 위주로 바뀌었다.
 

당시 한국경제의 조립가공형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마산수출자유지역이다. 1970년, 정부는 관세 등 각종 조세와 외환 관리 면세의 혜택을 주는 마산수출자유지역을 설치하였다.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 전자, 기계 분야의 고급 제품을 생산해 수출할 목적이었다.
1970년대 마산수출자유지역에는 주로 일본계의 90여개 업체가 최대 3만 명의 근로자를 고용하여, 단순 조립 방식의 전자, 금속, 정밀기기 제품을 생산하였다.
1979년의 수출액은 6억 달러 가량으로서 한국 전체 수출의 4% 정도였다.
 

 


이상철 교수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실제로 마산수출자유지역을 초기에 구상했을 당시에 정부 정책 속에서는 가능하면 우수한 기업들을 많이 유치해서 국내고용도 증가시키고 국내산업구조 발전에도 이바지 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막상 실제로 마산수출자유지역을 만들어서 운영해보니까 투자했던 대부분의 기업들이 일본기업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업들이 일본에서는 사양화되고 있는 그런 업종들이 많았고요. 정부가 기대했던 성과는 많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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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은 1970대 이후 꾸준히 급증하였다. 1971년 10억 달러를 달성한 수출은 1977년에 100억 달러를 돌파했고, 1988년엔 6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 시기의 주력 수출품은 정부의 중화학공업화 정책과 더불어 등장한 ‘중화학공업’ 제품이었다.
1988년까지 수출품목의 1위는 섬유의류였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중화학 제품의 수출이 급속히 늘면서 전자제품, 철강제품, 선박 등이 2, 3위 수출품목으로 올라섰다.
1980년대 후반에는 자동차가 3위의 수출품이 되었다.
1990년대에는 섬유류를 제치고 전자전기가 1위로 올라서고 새로 화공품, 일반기계 등이 들어왔다.
이처럼 수출상품이 단기간 내에 고부가가치화한 것은 한국이 경제발전의 사다리를 빠르게 뛰어올라갔음을 뜻한다.
 

1972년 8월 사우디에서 164km의 고속도로 건설공사를 따낸 삼환기업. 이것이 최초의 중동건설 진출이었다.
 

1973년 말 아랍 산유국들의 주도로 석유가격이 일약 4배로 오른 제1차 오일쇼크로 석유수입액이 급증하고 경상수지 적자가 확대되자 정부는 중동 진출에서 활로를 찾았다.
정부는 은행이 중동 진출 건설사의 지급 보증을 서도록 하여, 즉 건설업체의 부도가 나면 은행이 배상하게 할 정도로 적극 지원했다. 선두주자인 삼환을 필두로 여러 기업이 도로공사와 항만공사를 수주했다.
특히 현대건설은 1976년에 사우디 주베일산업항공사를 수주하는 쾌거를 전해왔다.
 

주베일산업항공사는 콘크리트블록 안벽과 방파제, 대형유조선 정박시설(OSTT) 공사로 규모가 무려 9억4천만 달러로 세계 최대 규모였다. 당시 우리 정부 1년 예산의 25%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이후 해외건설 수주액은 꾸준히 증가해 1982년 한국은 미국(점유율 36.5%)에 이어 2위(11.2%)를 차지했다.
 

1976년부터 1981년에 걸친 중동건설 수주액은 수출액의 절반 가까이 달할 정도. 중동진출은 오일쇼크를 극복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의 기업가와 근로자들이 뜨거운 모래바람이 부는 중동 건설현장에서 흘린 땀과 수고는 1970년대의 한국경제를 일으키는 큰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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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에서 미사일까지’, ‘이쑤시개에서 인공위성까지’ 이 같은 슬로건으로 취급하지 않는 수출 품목이 없었던 종합상사.
종합상사는 일본과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기업형태로, 1975년 수출액이 전체 수출의 2% 이상인 상장기업을 종합상사로 지정하면서 본격 등장했다.
 

국내 종합상사 1호는 삼성물산. 이후 쌍용, 대우실업, 국제상사, 한일합섬 등이 뒤를 이었다. 이어 1976년에 고려무역, 효성물산, 반도상사, 선경, 삼화, 금호실업 등이 종합상사 대열에 합류했다.
종합상사 초기에는 소수의 인기 품목을 단순 수출하는 방식으로 1970년대 후반까지 섬유류 수출에 주력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해외자원 개발에 적극 나섰고, 1990년대는 종합상사가 지닌 영업, 정보, 금융 능력 등을 이용해 서로 다른 형태의 공급원을 한데 묶어 사업을 수행하는 프로젝트형 사업으로 확대됐다.
급기야, 1990년대 중반 전체 수출의 50%를 차지할 정도로 종합상사는 비약적인 성장을 거두었다. 한마디로 한국 수출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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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0여 년 간 수출이 증가하는 동안 수입도 증가했다. 국제수지 적자가 지속되면서 개발전략의 지속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경제는 수출 성장과 더불어 대외균형에도 도달했다. 수출과 수입 비율은 수출로 수입을 얼마나 충당할 수 있는가, 곧 대외자립의 정도를 나타내는데, 그 수치는 경제개발과 더불어 계속 상승했다.
 

한국경제의 대외 자립에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1980년대 후반의 3저호황이었다.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 문제가 심각하던 1985년, 미국, 독일, 일본 등 선진국 재무장관들은 마르크화와 엔화의 절상, 즉, 달러화의 평가절하와 금리 인하를 결정했다. 이후 국제경제는 저달러, 저금리가 펼쳐졌다. 여기에 저유가가 더해졌다. 3저(低)가 온 것이다.
일본과 서독은 타격을 입은 반면, 한국이 뜻밖의 수혜를 입었다. 그간 일본 제품과 힘겹게 경쟁하던 한국 제품은 3저 덕분에 큰 가격경쟁력을 갖게 되었다. 한국의 중화학공업품 수출이 급증하고, ‘3저 호황’이 왔다. 1986년부터 1988년까지 3년간 한국은 대폭의 무역수지 흑자를 냈다. 외채도 감소했다.
 

1876년 조선왕조가 개항한 이후 약 110년간 무역수지 적자를 면치 못했던, 한국..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한국 경제는 드디어 대외자립 국면에 들어선 것이다.
 

 


송의영 교수 / 서강대 경제대학원

3저호황은 우리나라만 겪은 것이 아니거든요. 다른 국가도 다 좋은 환경이 있었는데 특히 아시아 국가들은 유독 한국만이 굉장한 반탄력을 보이거든요. 이러한 반탄력의 중심은 70년대 중화학공업에서 형성됐던 것이 사실이고, 사실 어떻게 보면 모순적이게도 구조조정이 제대로 안됐기 때문에 기업들이 상당한 초과설비를 가졌기 때문에 강력한 수출을 발생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은 인력 말고는 가진 게 없었다. 풍부한 천연자원이 있었다면 우리는 합판, 의류, 가발 등을 수출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초기에 단순한 가공품을 생산해본 경험이 있었기에, 후반에 고도의 기술과 숙련을 요하는 제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
 

1960년대 초 이래 1980년대 말까지 수출은 연 30~40%씩 증가하며 고도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수출 관련 산업에 대한 투자가 급증하였고, 소득 증가에 따른 소비 증가는 투자의 증가를 불렀다. 이처럼 수출, 투자, 소비가 연쇄적으로 증가하는 선순환을 통해 한국경제는 세계 최고 수준의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이 수출을 통해 한국인은 세계인으로 바뀌었다. 폐쇄된 나라에서 고립된 채 살아온 한국인. 그러나 수출주도공업화는 한국인을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는 주인공으로 바꾸어 놓았다. 한국인은 세계의 다양한 선·후진국들과 교류하고, 협력하는 세계인이 되었다. 이처럼 수출주도공업화 전략의 결과, 한국에는 세계경영 체제가 들어섰다. 앞으로도 이 세계경영의 질을 더욱 높임으로써 대한민국 경제는 더 선진화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