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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는 이렇게 싸웠다
자료형태 도서 시대/연도 광복~1950년대 / 1955.01.20.
규격 13.2x18.5x0.2㎝
한줄설명 1955년 학도의용병현충비 건립준비위원회에서 6·25전쟁 당시 포항지구 전투에서 전몰한 학도의용병현충비 건립자금을 마련하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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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5년 6월 21일 오후 2시, 서울 흑석동 국군묘지 앞 광장에서는 학도의용병현충비(學徒義勇兵顯忠碑)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이전 5월 14일, 육탄십용사현충비(肉彈十勇士顯忠碑) 제막식이 있은 뒤 약 한달 만에 함태영 부통령, 이선근 문교부장관, 김태선 서울시장, 신익희·정일형 민의원의원 등 여러 인사와 유가족 및 학생들이 모여 제막식이 진행되었다. 6·25전쟁 당시 포항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학도의용병 48인의 명복을 빌기 위한 현충비 제막식이었다.

  포항지구 전투는 6·25전쟁 초기 1950년 8월 1일부터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지기 직전인 9월 14일까지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벌인 동부지역 방어전투의 한 부분이다. 북한군의 공세로 제3사단은 고립될 위기에서 후퇴를 결정하였는데, 이때 학도의용병들은 8월 9일 배치된 이후 8월 11일 새벽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포항여중에 있던 후방지휘소의 후퇴를 엄호하는 역할을 했다. 11시간의 사투 끝에 71명 중 48명이 전사하였는데 학도의용병들이 시내 진출을 저지하는 동안 3사단 사령부와 기타 지원부대 및 경찰, 그리고 행정기관은 무사히 안전지대로 철수할 수 있었다. 병참부는 군수품들을 민간선박을 이용해 후송하였고, 병기부는 보유중인 노획무기 중 일부는 땅에 묻는 등 분할하여 구룡포로 철수하였다. 이처럼 군 보급품의 후송이 손실 없이 이루어져 아군의 차기 작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6·25전쟁 당시 제3사단장으로 포항지구 방어전투를 이끈 김석원(金錫源) 위원회장은 흑석동 한강변에 학도의용병현충비 건립을 적극 추진하였다. 당시 학생의 몸으로 전투에 참여하여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학도의용병들의 명복을 빌며 순국애족의 정신을 높이기 위하여 현충비 건립을 진행하였다. 학도의용병현충비 건립위원회(學徒義勇兵顯忠碑 建立準備委員會)는 1954년부터 조직되어 몇 차례의 회의를 통해 현충비 건립에 관한 사항을 논의하였다. 위원회는 김석원 회장과 최규남 서울대 총장, 백낙준 연세대 총장, 유진오 고려대 총장 등 총 21인의 문교, 국방, 교육권위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가 학도의용병현충비 건립준비위원회에서 1955년 1월에 발행한 자료이다. 6·25전쟁 당시 포항지구 전투에서 전몰한 학도의용병의 현충비 건립자금을 마련하고, 학도들에게 애국반공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발행한 책자로 표지 2장, 본문 34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교부장관 이선근의 격려문과 국방부장관 손원일의 격찬사를 시작으로 포항여중 교정 남측 격전장의 묘지사진(1951.11.28.), 전투에 의해 파괴된 포항여중 교사 사진(1950.08.11.)이 수록되어 있다. 본문은 출진의 새벽, 삼거리(三巨里)의 방어작전(防禦作戰), 포항육탄전(浦項肉彈戰)으로 구성되어 있고 취의서와 학도의용병현충비정면도, 현충비와 충혼탑 건립 장소와 진행예정사항 또한 기록되어 있다.

  학도의용병현충비는 현재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141-2 효사정공원 내에서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관리번호 12-2-4)로 관리되고 있다. 육탄십용사현충비(제막식 1955.05.14.)는 한강대교와 현충원을 잇는 동작대로 확장공사로 1978년에 서울현충원 안 현충문 오른편으로 이전하였다. 학도의용병현충비도 시내 삼청공원으로 이전하려 했으나 현재 위치에 남아 6·25전쟁의 참상과 학도병들의 그 날을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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