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관1은 조미수호통상조약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중심으로 한미동맹 조약의 체결·발효 및 전개 과정을 보여줍니다.
주제관2는 대한민국 대통령 열 분의 한미정상회담 미디어아트 전시입니다.
We Go Together : ROK-U.S. Alliance in Treaties&Declaration
한미상호방위조약이 1953년 10월 1일 체결됐다. 군사·안보 조약과 함께 경제 원조, 교육 등 다방면의 조약이 연이어 맺어졌다.
이러한 한미동맹의 기반 위에 한국은 6·25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나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이제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출범한 수많은 신생국들 가운데 시장경제의 발전과 정치적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해 낸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지난 70년간 한미동맹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억제하고 한국의 안정과 번영에 결정적인 기여를 해 왔다. 이제 안보협력을 넘어서, 정치·경제·문화·인적 교류 등 다방면의 폭넓은 협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발전하고 있다
선과 미국이 수교와 통상을 위해 맺은 조약이다. 1882년 5월 22일 인천에서 전권대사 신헌과 슈펠트가 체결했다.
상대국이 불공평하거나 경시를 당할 때 조력 및 거중조정(居中調停, Good Offices) 역할, 상대국에 대한 최혜국 대우, 치외법권 인정 등이 조약의 주요 내용이다. 거중조정은 외국과 분쟁 시 조정 및 중재 역할을 의미한다.
한국과 미국이 상대국의 방위를 위해 맺은 조약이다. 1953년 8월 8일 경무대에서 한국의 외무장관 변영태와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가 가조인(假調印)했다. 이어 10월 1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조약을 체결했고 1954년 1월 15일(한국), 1월 26일(미국<상원>) 양국 국회의 비준을 거쳐 1954년 11월 18일 발효됐다.
상대국의 정치적 독립 및 안전을 위협하는 무력공격에 대한 공동 대처, 미국의 군대의 주둔에 대한 한국의 허여(許與, Grants)와 미국의 수락 등이 조약의 주요 내용이다.
1953년 8월 8일 서울에서 가(假)조인한 한미상호방위조약 전문과 함께 덜레스 장관과의 공동성명문,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문이
수록돼 있다.
한국경제에서 미국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던 시기는 1950년대였다. 남과 북의 경제적 기반은 상호 보완성이 높았는데, 불행히 분단의 길로 치달았다. 게다가 경제체제 선택을 위한 정치세력 간 대립과 갈등은 초기의 경제활동을 급격히 위축시켰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1948년)되어 안정을 되찾아가던 과정에 발발한 6·25전쟁은 한국경제를 폐허로 만들었다.
전쟁으로 파괴된 산업시설, 사회간접자본, 공공시설 등을 복구·확충할 재원과 기술이 부족하였다. 미국은 전후 파괴된 시설을 복구·확충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제공하였다(1945년∼1960년대 미국의 원조규모: 30억 달러). 미국의 경제원조는 1960년대 한국경제가 도약하는데 발판이 되었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은 수출지향공업화에 근거한 경제개발전략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장기 지속의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이때 미국은 한국에 커다란 시장을 제공해주었고 대규모 공장 건설뿐 아니라 그 운영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까지 제공해주었다.
미국 평화봉사단은 1966년 9월 14일 대한민국과 미국 사이에 체결된 ‘미평화봉사단에 관한 협정’에 의거하여 조직됐다. 1966년부터 1981년까지 15년 동안 우리나라에 파견된 단원은 1,700여 명에 달한다.
평화봉사단은 전국 각지의 농어촌 지역에 파견되어 주로 영어교육, 보건, 농촌 지역개발 프로그램을 수행했다. 이들의 활동은 대한민국의 교육과 보건 분야에서 크게 기여한 것 외에도 서로의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양국 간의 우호를 증진시키는 데 역할을 해냈다.
: 주한미국대사 캐슬린 스티븐스의 한국 이야기
개인제공·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