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이야기

인구주택총조사,
우리의 시간을 품다

인류는 고대부터 국가 경영과 국민 복리를 위해 국가의 구성원인 인구를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지속돼온 이 이야기들을 연결하면 우리의 과거를 성찰하고, 현재의 모습을
진단함은 물론 미래 변화를 예상할 수 있다. 인구조사는 우리의 시간을 품고 있으니까. 글 이삼식 한양대학교 정책학과 교수, 부설 고령사회연구원 원장

  • 1960년 조사원들이 일반 가정을 방문해 ‘인구주택국세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 국가기록원

인구조사는 시대와 국가에 따라 각기 그 방식이 달랐다. 고대 로마제국에서는 시민 등록과 시세 조사를 담당하는 ‘센소(Censor)’라는 관리직이 인구조사를 맡았다. 오늘날 세계에서 통용되는 ‘인구센서스(Population Census)’라는 명칭은 그 직명에서 유래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삼한시대부터 호구조사가 실시된 기록이 남아 있으며, 현재 국내에서 쓰이는 ‘인구주택총조사’라는 용어는 1990년부터 통일해 사용하고 있다.

정확성 떨어졌던 과거의 호구조사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백제는 점구부(點口部)라는 호구조사 기구를 두었고, 통일신라는 호구조사 기록으로 장적(帳籍) 호구(戶口), 토지 면적, 노비 따위를 등록해둔 대장을 제정했다. 『고려사(高麗史)』 식화지(食貨志)에는 주군(州郡) 단위에서 매년 인구를 조사하고 민적을 정리해 호부에 제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면 관리와 세금 징수, 호구 관리를 담당하던 색리(色吏)가 3년마다 호구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항목은 호주의 직업을 제외하면 주로 호주 및 가구원의 신분과 인적사항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됐다. 흥미로운 점은 신분인데 부친, 조부, 증조부, 외조부 4대까지 조사하고 노비 및 피고용인의 경우에도 부모까지 조사했던 것이다. 당시 호구조사는 징세, 징병, 부역뿐 아니라 봉건적인 신분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수단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신분제가 흔들리면서 호구조사 역시 오기와 누락이 발생해 정확도가 떨어졌다. 16세기 후반부터 양반층은 군역을 기피하다 면역됐으며, 18세기 초에는 서얼(庶孼)까지 국역에서 벗어났다. 이들의 국역까지 떠맡게 된 평민들도 18세기 후반과 19세기에 걸쳐 국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분 상승을 시도했다. 예로, 부를 축적한 일부 평민들은 유학·교생·원생으로 허위 기재했다. 그러다 보니 19세기 중엽 양반 인구가 호적상 주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다. 경제력을 상실한 양반이 잔반(殘班)이나 평민으로, 평민이 고공(雇工)이나 노비로 신분이 하락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추진된 갑오개혁으로 모든 노비와 일부 천민이 해방되었고, 노비의 연좌율이 폐지됐다.
1896년 9월 1일에는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호구조사 규칙’이 제정됐다. 주요 내용은 호적의 내용을 매년 수정해 전국의 호수와 인구를 상세히 편적(編籍)하는 것이다. 이 규칙은 부역(賦役)과 징세(徵稅)의 행정 편의를 위한 것으로, 실질적인 신분 변동을 정확하게 반영할 수는 없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1909년에는 가족 신분 관계를 법률상 명확히 하고, 전국의 호구수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호적제도인 ‘민적법’을 제정했다. 이는 일제식 근대 호적으로 출생, 사망, 혼인, 이혼, 양자 등 가족 내 신분에 변동이 발생하면 호주가 본적지의 관할 면장에게 신고하도록 한 것이다. 민적법은 1923년에 ‘조선호적령’으로, 다시 1960년에는 ‘호적법’으로 대치됐다.
조선시대에는 호구조사와 별도로 인구조사가 최초로 실시되기도 했다. 신분 변동을 기록 및 관리하는 것이 호구조사의 주목적이었다면, 인구조사의 목적은 호수와 인구를 정확하게 헤아려 징병과 징용, 징세 등에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데 있었다. 당시 인구조사는 정치적·경제적·사회문화적으로 구획된 일정한 지역 내 거주하는 주민을 조사하는 ‘경오부(京五府)’ 조사 방식으로 시행됐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따르면, 1395년(태조 4년)에 실시된 최초 조사에서 인구는 322,746명으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1428년(세종 10년)에 조사한 인구가 103,328명으로 33년 사이에 무려 3분의 2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난다. 인구조사가 시행된 33년 사이에 전쟁이나 역병처럼 인구가 크게 감소할 만한 원인이 없었던 것을 고려할 때, 이는 경오부 조사가 정확하지 못했던 것을 보여준다.

  • 1925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의 인구 통계 현황을 정리해서 제작한 그림엽서
  • 1955년 제1회 간이 총인구조사에 사용하기 위해 제작한 간이 총인구조사 신고서

근대적 의미의 인구조사가 시작된
1925년 이후

근대적 의미의 인구조사는 완전성, 동시성, 개별성, 주기성의 원칙을 준수한 조사를 칭한다. ‘완전성’은 조사대상 지역에 있는 모든 사람을 조사하는 것이고 ‘동시성’은 정해진 시점이나 기간에 대해 조사하는 것이다. ‘개별성’은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조사하는 것이며, ‘주기성’은 일정한 주기로 조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인구조사를 세계에서는 ‘인구센서스’라 칭하는데, 미국의 1790년 인구센서스가 그 효시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925년부터 5년마다 근대적 의미의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일제는 1925년 우리나라를 대상으로 ‘간이국세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조사항목은 성별, 연령, 배우관계, 본적, 국적 등이었는데, 이는 일제가 식민지 지배를 위해 필요로 하는 항목들이었다. 1930년과 1935년에는 ‘조선국세조사’가 실시됐다. 1940년 ‘국세조사’와 1944년 ‘간이국세조사’에서는 일제의 의도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났는데 전쟁 수행에 필요한 징병, 징용을 위한 인적자원 파악에 중점을 두었다.
1948년 정부 수립 직후에는 산업국가 건설을 위한 인구통계 확보가 시급했다. 게다가 1950년 5월에 2대 민의원선거가 예정돼 있었다. 따라서 1950년에서 1년 앞당긴 1949년에 ‘총인구조사’를 실시했다. 6·25전쟁을 피해 조사가 실시될 수 있었지만, 속보자료를 제외한 일체의 조사 자료가 소실됐다. 1955년 ‘간이총인구조사’는 전쟁으로 파괴된 산업시설과 사회간접자본을 복구하고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한 기초자료를 확보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 1955년 발행한 제1회 간이 총인구조사 홍보 포스터
  • (좌측부터)1960년 인구주택국세조사 홍보 표어, 광복 이후 경제기획원과 법원행정처에서 호적 신고를 장려하기 위해 발행한 표어

시대 흐름에 맞춰 발전 거듭한
인구주택총조사

1960년 ‘인구주택국세조사’는 유엔(UN)의 ‘세계 센서스계획’에 따라 완전성, 동시성, 개별성, 주기성의 원칙들을 제대로 준수했으며 이는 우리나라에서 현대적인 인구주택총조사를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1965년에 실시돼야 했던 조사는 1962년부터 추진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위한 재원 확보 문제로 1966년으로 연기됐고 주택조사는 생략됐다. 또한 예산 절감 차원에서 출산력과 경제활동에 관한 조사항목들이 전국 가구의 10%에 한해 조사됐는데, 이는 인구주택총조사에 표본기법이 도입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개인의 사생활이 침해될 가능성이 높거나 응답 부담이 큰 조사 항목들은 굳이 전체 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할 필요가 없었고, 이는 현대식 인구주택총조사의 트렌드이기도 했다. 조사도 종전의 지방공무원이나 통반장 대신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모집한 조사원이 수행하기 시작했다. 공무원과 통반장으로 모든 가구들을 방문 조사하는 데 한계가 있어 공부(公簿)를 베끼거나 허위로 조사표를 작성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일반 국민에서 선발된 조사원들을 단기간에 교육하고 현장조사에 투입하는 데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여전히 허위로 조사표를 작성하거나, 힘들어서 도중에 포기하는 사례들이 허다했다고 한다.
현대로 접어들며 국민들 사이에는 사생활 보호를 중시하는 경향이 높아지고 조사응답에 부담을 느끼는 경향이 더욱 커졌다. 더불어 맞벌이 부부와 1인 가구 증가 등 가구 구성이나 생활 패턴에 변화가 있다 보니 낮 동안 집에 사람이 없는 경우가 증가했다. 또한, 사회가 급속하게 변화함에 따라 조사 결과를 보다 빨리 이용하려는 요구가 높아졌다. 이에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부터는 집에 찾아가도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인터넷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부터는 성별과 연령, 국적, 가구주와의 관계, 주택 등 전 국민을 대상으로 조사하는 항목들에 대해 주민등록부, 건축물대장 등 행정자료를 이용하는 ‘등록센서스’를 도입했고 이외의 항목들은 전 국민의 20%인 1,000만 명을 대상으로 직접 조사했다. 지난 202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비대면 조사를 원하는 가구는 인터넷(모바일) 및 전화 조사를 실시하고, 비대면 조사에 응하지 않은 가구에 대해서는 방문면접 조사를 병행했다.

  • 외국인 거주자를 위해 다양한 외국어로 제작된 2015 인구주택총조사표 Ⓒ통계청

시대에 따른 조사항목의 변화

인구주택총조사의 조사항목은 환경 변화에 대응하고, 시대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설계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산업화와 현대화가 시작됐던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경제ㆍ사회 발전에 필요한 조사항목들이 대폭 추가됐다. 1960년만 해도 초가집과 기와집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주택을 건설하고 기존 주택을 개량하기 위해서는 건축 시기, 지붕 재료와 외벽 재료를 조사해야 했다. 그리고 산업화의 영향으로 인구의 도시집중과 그로 인한 교통 혼잡 및 주택 부족이 사회 문제로 등장한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인구 이동, 통근ㆍ통학 및 임차료에 관한 조사가 강화됐다.
2000년에는 4차 산업혁명시대에 진입하면서 국민의 컴퓨터, 인터넷 및 개인휴대용 통신기기의 활용 정도를 파악하기 위한 조사를 추가했다. 지난 2020년에는 노화 등으로 인한 활동 곤란 상태와 돌봄 제공자를 조사해 장기 요양과 돌봄 공백에 대비하기 위한 기초자료로 제공하고자 했다. 또한 홀로 사는 노인과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1인 가구의 사유와 그 기간을 조사했다. 특히, 2020년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로 반려동물 항목을 포함시키기도 했는데, 이는 최근 변화하는 환경을 반영한 것이다.

강대국 되고 싶다면 국민을 잘 이해해야

인구의 규모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은 국민을 잘 이해 한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잘 이해하는 만큼 교육과 일자리, 보건 복지 등에 관한 정책들이 정확해지고 효과적일 테니 말이다. 고대 4대 문명 국가에서 인구조사가 가장 먼저 시작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인류사에서 강대국, 선진국, 복지국가 등은 모두 인구조사가 잘 실시된 국가들이었다. 물론 인구조사가 잘 실시되는 것은 정부만의 몫은 아니다. 실제 응답하는 국민의 몫이 가장 크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유념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