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파병의 역사

베트남의 현대사는 혼란스러웠다. 열강들의 지배를 받았고,
남과 북으로 나뉘기도 했으며, 굵직한 전쟁을 치러냈다.
군사 전문가의 글을 통해 베트남이 전쟁의 포화에 놓이게 된 배경,
그리고 우리나라는 어떤 과정을 거쳐 파병에 나섰는지,
파병 이후 우리 현대사에는 어떤 변화가 따랐는지 살펴본다. (편집자 주)
글 이신재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 1971년 파월 한국군 맹호부대 환송식 현장 Ⓒ 경향신문사

전쟁으로 점철된 베트남 현대사

‘베트남의 현대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베트남은 오랜 시간 전쟁 속에 놓여 있었다. 1858년부터 시작된 프랑스의 식민 지배는 끝나지 않고, 오히려 1940년부터는 일본의 지배로 이어졌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독립을 기대했지만, 열강들은 베트남을 독립시키지 않고 북위 16도선을 기준으로 분할 통치했다. 마치 한반도가 독립했지만 38도선을 기준으로 나뉘었던 것과 똑같았다.
이후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 대한 기득권을 주장하며 다시금 베트남에 주둔하면서 호찌민(Ho Chi Minh)이 이끄는 베트남 독립동맹(Vietminh)과 8년에 걸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Dien Bien Phu)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끝이 났다. 그러나 전후 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개최된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또다시 분할됐고, 2년 뒤 선거를 통해 통일정부를 만들기로 결정됐다.
그러나 각기 다른 이념을 지향하는 남·북 베트남이 각자의 체제 강화에 주력하면서 베트남 정세는 점점 대결과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프랑스가 떠난 후 미국이 개입하면서 2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것이 한국군이 파병됐던 바로 그 베트남전쟁이다.

한국군의 첫 해외 파병

한국과 남베트남은 1956년 국교를 맺은 이후 분단과 반공의 동질감 속에서 양국 대통령이 상호 방문하는 등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배경 아래 이승만 정부에서 군대의 파병이 처음 시도됐고, 박정희 정부에서도 1961년 11월 케네디 정부에 한국군의 파병을 제의했지만, 성사되진 못했다.
그러나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서거 이후 등장한 린든 존슨 행정부의 베트남 정책이 변화하면서 한국군의 파병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존슨 행정부는 1964년 3월 17일 NSAM-28(중요 국가안보 정책 결정서의 일종)을 통해 베트남 문제에 이전과 달리 적극 개입하기로 했다. 그리고 5월 9일엔 한국 등 자유진영 25개국에 남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공식 요청했다. 이른바 ‘더 많은 깃발(More Flags)’ 캠페인의 시작이었다.
한국 정부가 남베트남과 미국의 지원 요청을 받은 이후 1964년 7월 31일 국회에서 제1차 파병동의안이 가결됐고 같은 해 9월에 140명 규모의 의료부대와 태권도교관단을 처음 파병했다.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이자 1973년 3월까지 이어진 연인원 32만여 명 파병의 출발점이었다. 1차 파병에 이어 1965년 2월에는 공병과 수송부대가 주축이 된 2,000명 규모의 한국군사원조단(비둘기부대)이 2차로 파병됐다.
이때까지가 비전투부대 파병이었다면, 1965년 8월 13일에는 전투부대 파병 동의안이 가결되며 같은 해 10월 전투부대로서 수도사단(맹호부대)과 해병 제2여단(청룡부대)이 처음 파병됐다. 1966년에는 제9사단(백마부대)이 추가로 파병되면서 한국은 5만 명의 병력이 베트남에 주둔하게 됐다. 이것은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한 국가들 가운데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였다. 한국군은 남베트남에서 일정한 책임 지역을 할당받아 남베트남 정부의 이른바 ‘국가평정사업’을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5,000여 명이 목숨을 잃고, 1만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피해도 입었다. 이후 1973년 1월 체결된 파리평화협정에 따라 전쟁이 종식되면서 모두 철군했고, 한국의 베트남전쟁도 8년여의 막을 내렸다.

한국 현대사의 중대한 사건

베트남전쟁은 군사적 측면뿐 아니라 1960∼1970년대 한국 현대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브라운각서」로 상징되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 및 경제원조계획에 따라 한국군의 군사력은 대폭 개선됐다. 경제적으로도 이른바 ‘베트남 특수’로 불리며 많은 기업과 ‘파월 기술자’들이 베트남에 진출했다. 이를 통해 국내로 유입된 10억 달러에 달하는 외화는 한국 경제가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무렵 국내에서도 국가적 차원에서 파병 군인과 국내 가족들을 지원하기 위해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파월장병지원위원회’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최초의 해외 파병이었던 만큼 현대사에서 다양한 첫 사례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운영했던 ‘주월한국군방송국(KFVN)’은 한국 방송 사상 최초의 해외 한국어 방송이었고, 한국의 농업기술은 ‘농업기술단’을 통해 베트남에 처음 전파되기도 했다. 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파견된 종군기자들은 국내 언론사의 첫 해외 전쟁 취재였다. 파병군인들의 김치에 대한 향수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통조림 형태의 한국형 전투식량(K-Ration)도 이때 처음 등장했다.
남베트남은 한국군이 철군한 2년 뒤인 1975년 4월 30일에 공산화됐다. 한국과 통일 베트남은 1992년 12월 22일 ‘과거는 닫고, 미래로 가자’는 기조 아래 국교를 맺은 뒤 현재는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발전했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는 국제 정치 속에서 한국과 베트남이 과거 전쟁의 상흔을 딛고 더욱더 발전해나가길 기대해본다.

이달의 근현대사

월별 주요 일정
날짜 내용
7

1

제헌국회,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 1948

2

서재필을 중심으로 독립협회 결성 1896

3

반공법 공포 1961

4

7·4 남북 공동 성명 1972

7

경부고속도로 개통 1970

노태우 대통령의 7·7 선언 1988

8

북한 김일성 주석 사망 1994

17

제헌절 제정 1948

19

독립운동가 여운형 암살 1947

26

노근리 양민 희생 사건 1950

27

6·25 전쟁, 휴전 돌입 1953

31

베트남전쟁 제1차 파병동의안 가결 1964

8

1

일제, 조선인 대상 징병제 시행 1943

6

광복 이후 병역법 제정에 따라 징병제 도입 1949

7

하와이 이민자를 중심으로 한 한인 단체 ‘신민회’ 결성 1903

8

김대중 납치 사건 1973

10

동아일보·조선일보, 일제 국책에 따라 폐간 1940

15

일본의 항복으로 조선이 광복을 맞다 1945

20

대학수학능력시험 첫 실시 1993

22

한일병합조약 조인 1910

23

실미도 사건 발생 1971

27

전두환 제11대 대통령 당선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