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이야기

당신과 나, 광화문

1392년 조선 건국 이후 태조 이성계와 삼봉 정도전은 1395년 경복궁을 창건하고 당시
궁궐의 정문으로 광화문을 세웠다. 광화문(光化門)이란 명칭은 1426년(세종 8년)에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 ‘광화’란 『서경』에 나오는 말로 ‘빛(군주의 덕)이 사방으로
덮이고 화(바른 정치)는 만방에 미친다’는 뜻이다. 광화문은 이후 역사의 흐름에 따라
해체되고 복원되는 등 영욕의 세월을 견뎠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그리고 각 시기
정치적 목적에 따라 각기 다르게 변형되고 이용됐다.

  • <한양도(漢陽圖)> / 위백규(魏伯珪, 1727~1798)가 1770년에 저술한 『환영지(寰瀛誌)』에 삽입된 여러 지도 중 하나로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이 그렸다. 경복궁과 광화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 서울역사아카이브

광화문과 육조거리의 고난

일제강점기 시절 광화문 일대와 육조거리를 재현한 전시 모형
Ⓒ 모형: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소장,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광화문 앞에 자리 잡은 육조거리(육조앞길)는 조선시대 당시 의정부와 육조, 삼군부, 사헌부 등이 양쪽에 위치한 행정 타운이었다. 이는 조선의 실질적인 설계자였던 정도전의 계획으로 광화문 일대를 ‘왕의 거리’로 만들어 조선 왕조의 위엄을 보여주고자 했다. 광화문과 육조거리는 조선이 저물고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큰 변화에 직면했다.
우리의 영토를 점령한 일제는 식민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처음에는 남산 통감부 자리를 쓰다가 1926년 경복궁 근정전 앞으로 위치를 바꿨다.
육조거리의 이름은 ‘광화문통’으로 바꾸었고 양쪽에 늘어서 있던 한옥 관청들을 밀어버렸다. 광화문도 1926년 해체 작업에 들어가 경복궁 동쪽으로 옮겨버렸다. 그리고 육조거리 가운데에다 은행나무를 심었다. 은행나무는 동경(東京)의 상징과도 같은 나무였다. 문제는 또 있었다. 일제가 광화문과 그 일대의 축을 뒤틀어버린 것이다. 본래 경복궁 주요 건물들과 광화문, 육조거리는 일자 축선으로 이어져 있었으며 이는 조선 왕조의 정통성과 위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경복궁의 남북 중심축에서 동쪽으로 3.75도 어긋난 곳에 지었다. 그러고는 철제 말뚝을 땅속 깊숙이 박았다. 경복궁 내에, 그것도 뒤틀려 세워진 조선총독부 건물은 그 자체로 민족의 정체성을 흔드는 위협이었다.

본래의 축으로 돌아오다

해방 이후에도 광화문은 고난의 행군을 계속했다. 6·25 전쟁 때는 폭격으로 불탔고, 1968년에 다시 중건했으나 목재가 아닌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었다. 2006년 경복궁 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철거 및 해체됐던 광화문은 2010년 8월 목재로 완공돼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광화문은 정치적 목적에 따라, 시대 상황에 따라 모습이 바뀌었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을 진행하며 국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광화문을 복원했고, 노무현 정부는 박정희 정부가 세운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광화문을 부수고 목재로 된 새로운 광화문 복원을 추진했다. 당시 문화재청장이던 유홍준 명지대학교 석좌교수가 주축이 돼 서울시와 논의한 끝에 2010년 지금 우리가 두 눈으로 목격할 수 있는 광화문이 재탄생했다. 뒤틀려 있던 광화문은 이때 본래의 축으로 돌아왔다.

  • 1906~1907년 광화문 앞 풍경 Ⓒ 국립민속박물관

도착하지 않은 답장

광화문 광장은 광화문이 완공되기 전 2009년에 개장했다. 본래 ‘왕의 거리’였던 광화문 일대는 이제 민중, 모든 사람의 것이 됐다. 이른바 말하는 ‘광화문 세대’니 ‘광화문 정신’이라는 말도 그 이후에 생겨났다. 이성계와 정도전이 계획하고 꿈꾸던 왕의 거리에서 이제 사람들은 걷고 대화한다. 손을 높이 들어 ‘민중의 외침’을 부르짖는 공간도 광화문 일대가 됐다.
권력의 소용돌이는 광화문을 손아귀에 쥐고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이를 다시 붙잡아 안정시킨 것은 민중, 평범한 사람들의 힘이다. 사람들은 이제 광화문에서 삶과 사랑을 노래하고 꿈꾼다.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세계에 묻는다.
올 3월 광화문은 화제의 중심에 섰다. 확장 공사 중 아스팔트 바닥을 걷어내니 조선시대 유적과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것. 조선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수로는 그대로 보존돼 있었고 각종 도자기와 기와편, 식기들도 발굴됐다. 삼군부와 사헌부, 육조 등 조선 핵심 기구가 자리했던 곳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그 가치는 높을 수밖에 없다.
앞으로 광화문은 얼마나 더 많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줄까. 사람들은 시그널을 보내지만, 답장은 아직 다 도착하지 않았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광화문은 일부분일 뿐이다. 고난의 행군을 거듭해온 광화문을 위로하며 그 답을 기다린다. 그때까지 광화문 주변에는 어떤 말들이 공기처럼 떠돌 것이다. “당신과 나, 우리는 광화문입니다.”

2010년 광화문 복원사업에 대한 말말

일제강점기 이후 서울의 공공 공간이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중략) 광화문이 완공되고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에 들어갈 수 있는 날이 오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삶과 문화유산이 만날 수 있는 매우 의미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 생길 것이다. 광화문 뒤쪽에는 우리의 문화유산이 존재하고 그 앞에서는 오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공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 광화문 복원사업을 기획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유홍준 교수(당시 문화재청장)

이 나라에서 문화유산의 역할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은 보수적이거나 퇴보적인 움직임이 아니다. 오히려 국가적 치유의 과정이다. 지난 한 세기 동안의 상처를 치료하고, 다음 세기를 준비하는 과정이다. 조선총독부 건물이라는 형태로 남아 있었던 일제 식민 지배의 상처를 뿌리 뽑겠다는 결정은 대담했다. 경복궁과 그 일대를 복원하겠다는 계획은 혁신적이었다. 왕관에 박힌, 아름답게 빛나는 보석 같은 광화문을 복원함으로써 한국은 초현대화 도시도 문화유산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더 풍요로워지고 더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
- 하워드 리드, 『광화문의 부활, 잃어버린 빛을 찾다』, 중앙일보, 2010, 1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