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 유물 이야기

‘만병통치약 팝니다’
근현대 매약(賣藥) 이야기

약속과 모임이 많은 연말연시. 근처 약국이나 편의점에서 숙취 해소제, 자양강장제 등을 찾게 되는 때다. 갑자기 체하거나 증세가 가벼울 때 찾곤 하는 가정상비약은 의사의 처방 없이 미리 제조해 시판된다. ‘감기 조심하세요~’, ‘두통, 치통, 생리통엔~’과 같이 대중 매체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약품의 광고 문구가 익숙하다. 매약은 언제부터 우리 일상과 가까워졌을까?

용각산
구리개 한약업자들과 근대 약

19세기 후반 조선의 개항은 나라의 정세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을 끼쳤다. 개항 이후 양약 수입이 증가하고, 제중원에서는 서양 약품인 퀴닌(quinine), 모르핀(morphine) 등을 치료제로 사용하면서 한약과는 다른, 특히 즉효적 면에서 사람들은 ‘근대 약’에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개항지를 중심으로 일본인이 세운 병원, 선교사가 개원한 의료 시설, 일본인 약상 등을 통해 서양 약품을 접할 수 있었다.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일본에서 제조한 매약이 물밀듯이 쏟아졌다. 가장 인기가 있던 것은 인단(仁丹), 용각산(龍角散), 금계랍 등이었다. 인단은 구강 청결 약품이었지만 일제강점기 매약 광고에서는 두통, 피로 해소에도 좋은 강장제로서의 효능을 강조했다. 진해 거담제인 용각산은 도라지가 주성분이었는데, 제품명은 ‘용의 뿔’이라는 뜻을 붙여 세상에는 없는 진귀한 보물인 것처럼 광고했다. 금계랍은 주로 말라리아 치료에 쓰인 퀴닌을 우리말로 음차한 것으로 만병통치약으로 소문이 나면서 비싼 값에 팔리거나 가짜가 판을 쳤다.

이렇듯 새로운 환경에서도 다수의 한약업자는 민간에서의 수요가 유지됐기 때문에 기존 한약재 유통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한약업계 중심지이던 구리개(銅峴, 현 서울시 중구 을지로 일대)에서 몇몇 한약업자가 적극적으로 매약 활동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당시 한약업자가 서양 의학을 배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 한약재 기반에 양약을 더해 신약을 제조하고, 일본인 약상의 상업 수단을 적절히 이용해 매약 활동을 한 것이다. 약 제형이 단(丹), 환(丸), 산(散), 수(水)인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구리개 한약업자들은 1913년 공동투자 방식으로 조선매약주식회사를 설립해 대량 생산·판매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금계랍
천일 조고약
령신환
동서 합작과 대형 약방의 등장

1900년을 전후로 동화약방, 제생당, 화평당, 천일약방 등 대형 약방이 등장하고 경쟁적으로 매약 제조 판매에 돌입했다. 누구나 알 법한 우리나라의 매약으로는 122년의 역사를 가진 동화약품의 ‘활명수(活命水)’가 있다. 활명수는 1897년에 선전관 민병호가 한약재에 서양 의학을 접목해 대중화한 신약이다. 19세기 후반에는 급체로도 사망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활명수는 말 그대로 생명을 살리는 물이었다.

당시 활명수는 꽤 비싼 편에 속했으나, 약품이 귀했던지라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이에 따라 다른 약방에서도 소화기 계통의 매약을 앞다투어 내놓았다. 제생당 약방에서는 ‘청심보명단’, 천일약방에서는 ‘천일령신환’ 등을 선보였다. 그중에서도 조선매약의 ‘령신환’이 유명했다.

대형 약방은 제조 매약 판매를 확대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이용했다. 지면 광고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각지에 판매점을 설치하고 상표등록을 통해 독점적 판매권을 얻고자 했다. 1930년대는 신문의 지면 절반이 매약 광고일 정도로 치열했다. “이 약 사실 때 반드시 부채 상표를 주의하시오”, “엄마가 다른 고약은 안 되고, 꼭 됴고약(趙膏藥)을 사오라고 했다”는 등의 광고 문구로 해당 매약의 상표를 강조했다. 근대에 접어들며 변화를 맞은 약업 시장에서 신약 열풍은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의료 환경이 열악하던 당시 상황에서 금방 효과를 내는 약품은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신통방통한 물건이었을 테니 말이다. 효능이 다른 약일지라도 대부분의 매약은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과대광고를 하곤 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꾸준히 수요가 있었고, 이는 대형 약방의 등장과 매약 판매 활성화로 나타났다. 우리의 일상과 맞닿아 있는 매약에서 사소하지만 흥미로운 역사의 흐름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글. 자료관리과 김경연 학예연구원
참고 자료. 서울대학교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사진과 함께 보는 한국 근현대 의료문화사 1879-1960>, 웅진씽크빅, 2009.
박윤재, ‘한말 일제 초대형 약방의 신약 발매와 한약의 변화’, <역사와 현실> 90호, 2013, pp.239~265.
백규환·박규리·이상재, ‘조선매약주식회사를 통해 본 일제강점기 한약의 모습’, <대한한의학 방제학회지> 제23권 제1호, 2015, pp.15~24.
박찬영, ‘일제강점기 약업정책과 조선인 약업자의 대응’, 경북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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