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전시회Ⅱ

한국영화 100주년 기념 특별전

<1950년대 한국영화, 새로운 시대를 열다>

1950년대 한국영화는 6·25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진 깊은 상처를 보듬고 위로해주었다. 이 시기에 현대적 의미의 한국영화가 개화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이하여 기획된 특별전 이야기를 전한다.

2019년은 최초의 한국영화로 평가되는 연쇄극 <의리적 구토>(1919)가 제작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한국영화의 성장기’라 불리는 1950년대 중·후반의 한국영화 포스터와 광고지 컬렉션을 소개하는 소장 자료 특별전을 마련했다.

왜 하필 1950년대 중·후반인가? 한국영화 100년 역사를 통틀어 1950년대 중·후반이 지니는 영화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이 시기는 광복 후의 혼란과 6·25전쟁의 폐허를 딛고 한국영화가 양적, 질적으로 급성장한 때다. 1955년까지 연간 20편을 넘지 못하던 제작 편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처음으로 100편대(1959년 111편)에 돌입했고, 대규모 촬영소가 설립되어 본격적인 영화 제작 시스템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한국영화 최초의 국제영화제 수상작이 나오고, 최초의 여성 감독이 등장했으며, 한국의 ‘할리우드’라 불린 충무로가 형성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또한 다양한 장르가 시도되며 다가올 한국영화 전성기가 태동한 시기이기도 하다. 즉 1950년대 중·후반은 현대적 의미의 한국영화가 개화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당시 한국영화가 급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1954년 ‘국산 영화 입장세 면세 조치’ 등의 정책적 호재와 대중문화에 대한 대중의 욕구가 높아진 데 비해 영화를 능가할 만한 오락거리가 전무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광복과 전쟁을 거치며 천지개벽이라 할 만큼 격변하는 당시의 사회상을 영화가 생생히 투영해냄으로써 대중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은 것이 영화 산업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1950년대 중·후반에 제작된 한국영화가 지니는 또 다른 의의가 있다. 일반적으로 6·25전쟁 직후의 사회를 생각할 때 ‘폐허’, ‘궁핍’, ‘암울’과 같은 어두운 이미지가 떠오른다. 모든 것이 철저하게 파괴된 세상….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사람들은 먹고사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영화’에 열광했다. 처참한 현실에 지친 마음을 영화를 통해 잠시나마 달래고 위로받았으며 희망을 엿보았다. ‘문화의 힘’이 이렇게 클 수 있다는 것을, 1950년대 중·후반의 한국영화는 증명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전후(戰後)의 피폐하고 고달팠던 삶 속에서 대중에게 위로와 희망을 건넨 1950년대 중·후반 영화를 두루 살펴봄과 동시에, 영화에 투영된 당시 사회상을 그려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춘향전 1955 (36.7X25.9)
감독 | 이규환
출연 | 조미령, 노경희, 이민, 전택이, 이금룡
피아골 1955 (53.4X25.8)
감독 | 이강천
출연 | 노경희, 이예춘, 김진규, 김영희, 허장강
1부: 시대의 거울, 영화

1950년대 중·후반 한국 사회는 전후의 궁핍과 암울함이 일상에 드리워져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새 출발에 대한 희망과 에너지가 일제히 분출된 시기였다. 또한 서구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문화가 물밀듯이 흘러 들어왔다. 사람들은 그간 강조되었던 집단의 목소리와 이념보다는 개인의 목소리와 자아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한국영화는 기존의 계몽성을 탈피해 상업성·대중성·오락성을 본격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했고, 한발 더 나아가 개성과 예술성을 실험했다. <춘향전>(1955)과 <피아골>(1955), <자유부인>(1956)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 탄생해 한국영화 성장의 시작을 알렸다.

특히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은 전례 없는 2개월간의 장기 흥행 기록을 세우며 한국영화 도약의 신호탄이 되었다. <춘향전>의 흥행은 한국영화도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한국영화가 본격적으로 상업성·대중성·오락성을 추구하는 길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1955)은 반공 영화의 외형을 띠었지만, 빨치산 대원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려내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문제가 되어 반공 정서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상영 불가 조치를 당했고, 이는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통해 한국영화가 이념적 성향에서 벗어나 개인과 인간성을 강조하는 분위기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1956)은 1950년대 사회상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영화다. 정비석의 소설이 원작으로, 물질 만능주의와 서구 문화 신봉, 여성의 자유연애와 흔들리는 일부일처제 윤리 등 서구적 생활양식과 전통적 가치관이 혼재하고 대립하는 당시의 시대상을 생생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2부: 다양한 장르의 등장

1950년대 중·후반에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 시대 분위기를 타고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영화를 ‘민중 계몽’의 도구로 여기던 과거와 달리 상업성이 부각되면서 ‘대중적 오락’으로서 영화의 특성에 주목했고, 한편으로는 개성과 예술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시대극(사극), 멜로드라마를 비롯한 도시현대극, 코미디, 범죄·스릴러, 현실 비판적 사회물 등 다양한 장르가 등장했다.

시대극(사극)
막난이 비사 1955 (73.6X25.7)
감독 | 김성민
출연 | 전택이, 노경희, 이경희, 복혜숙, 이민
희극(코미디)
서울의 휴일 1956 (26.6X77.4)
감독 | 이용민
출연 | 노능걸, 양미희, 임성숙, 박상익,
김신재
멜로드라마와 도시현대극
애인 1956 (26.0X76.3)
감독 | 홍성기
출연 | 주증녀, 이예춘, 전택이, 노경희,
서춘광
기타(범죄·스릴러, 갱스터, 사회물 등)
운명의 손 1954 (30.3X21.3)
감독 | 한형모
출연 | 윤인자, 이향, 주선태
지옥화 1958 (53.5X38.3)
감독 | 신상옥
출연 | 최은희, 김학, 조해원, 강선희
3부: 한국 최초

1950년대에는 ‘한국 최초’의 영예를 얻은 영화도 다수 등장했다. 우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감독 박남옥이 <미망인>(1955)으로 데뷔해 이후 홍은원, 최은희 같은 여성 감독의 등장에 문을 열어주었다. 이병일의 <시집가는 날>(1956)은 1957년 제4회 아세아영화제에서 특별희극상을 수상해 한국영화 최초로 국제영화제 수상작이 되는 영광을 안았으며, 같은 해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영화 산업이 성장함에 따라 외국과의 합작도 시도되었다. 전창근의 <이국정원>(1957)은 최초의 한국·홍콩 합작 영화로, 이후 다양한 공동 제작의 물꼬를 터주었다. 한편 1957년 수도영화사가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을 본떠 동양 최대 규모의 안양촬영소(부지 3만3500평, 건평 1975평)를 건립하고,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 <생명>(1958)을 제작했다. 이로써 한국영화계는 대형 화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시집가는 날 1956 (25.2X52.0)
감독 | 이병일
출연 | 조미령, 김승호, 최현, 김유희, 송해천
생명 1958 (26.0X55.0)
감독 | 이강천
출연 | 최성진, 문정숙, 장민호, 이민자, 이대엽


한국영화 100주년 기념 특별전 <1950년대 한국영화, 새로운 시대를 열다>

한국영화 100주년 기념 특별전
<1950년대 한국영화, 새로운 시대를 열다>

기간
2019년 10월 31일(목)~2020년 2월 29일(토)
장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
관람료
무료
관람 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수요일 오후 9시까지 야간 개관)
관람 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 가능
관람 문의
02-3703-9200
글. 자료관리과 문근실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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