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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해방 : 독립운동과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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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역사박물관 현대사 교육 영상 자료 1

 

해방 : 독립운동과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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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세기 후반.
막강한 군사력, 경제력으로 무장한 나라들이 힘없는 나라들을 식민지화하며 세력을 확장시켜 나가던 제국주의 시대!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시대

 

국제관계는 한 나라, 한 국민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1876년 한국이 개항한 후 여러 열강이 한국에 눈독을 들였다.
그중에서도 한반도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청국, 일본, 러시아가 각축을 벌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청국을 물리쳤으나 러시아, 독일, 프랑스 3국의 간섭 때문에 일본의 한반도와 만주 진출은 제동이 걸렸다.
이에 일본은 영국과 미국에 접근했다.

 

조선의 개항 / 1876년
일본과 부산, 원산, 인천항을 통한 통상 허용

 

청일전쟁 / 1894년
청나라와 일본제국이 조선의 지배권을 얻기 위해 벌인 전쟁

 

3국간섭 1895년
청일전쟁 후 일본이 차지한 랴오둥[遼東] 반도를 러시아·프랑스·독일 등 3국이 개입하여 청에 돌려주게 한 사건.

 

1904년 만주와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벌일 때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후원했다.

 

러일전쟁 1904~1905년
만주와 한국의 배타적인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제국주의 전쟁

 

1902년 영국은 일본과 영일동맹을 맺고, 또 미국은 일본과 1905년 태프트-가츠라 밀약을 맺으며 일본을 지원했다.

 

영일동맹 1902년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이 일본과 맺은 동맹
태프트-가츠라 밀약 Taft-Katsura Secret Agreement 1905년
일본의 한반도의 지배,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상호 양해한 비밀협정

 

이렇게 해서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그 후 미국, 프랑스의 묵인과 러시아의 동의를 얻은 일본은 1910년 한국을 병합하기에 이른다.
어느 열강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던 한국은 그렇게 나라를 잃고 말았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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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일본의 무단통치는 한국인을 더욱 분노케 했다. 이에 주권을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이 나라 안팎에서 활발히 전개됐다.

 

무단통치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무력으로 다스린 정치

 

하와이의 대조선국민군단

 

한인 대표자 대회 (1914.4.14.~16.)

 

1910년대 말, 러시아혁명을 일으킨 레닌이 ‘민족자결의 원칙’을 발표하고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독립운동가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니콜라이 레닌

 

민족자결주의 [우드로 윌슨 미 대통령 주창]
민족의식을 지닌 집단은 독자적인 국가를 형성하고 자신의 정부를 선택할 수 있다.

 

1918년 12월 미주의 한인들은 이승만 등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기로 결의했고, 중국 상하이의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여 민족 독립 의지를 알렸다.
만주에서는 독립운동가 39명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일제에 대한 육탄 혈전을 결의했다.

 

김규식

 

만주 용정 독립시위 현장 (1919.3.)

 

노령 국민의회 선언서
조선 독립을 선포하고, 일제가 불응하면 혈전을 포고하겠다는 내용

 

이러한 국제 정세 및 한국 독립운동가의 활동 소식을 들은 일본 도쿄의 젊은 유학생들은 1919년 2월 8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다.

 

2.8 독립선언을 이끈 동경 유학생들

 

2.8 독립 선언서
1919년 2월 8일 동경 유학생들이 발표한 독립선언

 

국내에서도 이 흐름에 주목하여 거족적인 민족운동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천도교계,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학생과 불교계가 가세한 인사들이 고종의 국장에 많은 군중이 모일 것을 예상하고 대규모 시위를 통해 민족의 독립의지를 밝히기로 계획했다.
바로 거족적인 3.1운동이었다.
손병희, 한용운 이승훈 등 민족 대표 33인은 음식점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으며, 탑골공원에 모인 천여 명의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거리에 나가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순식간에 대규모 시민들이 참여하여 서울은 만세소리로 뒤덮였다. 이렇게 시작된 만세시위는 전국 도시와 농촌으로 확산되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계층이 참여했다.
우리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인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단합된 독립의지를 세계 만방에 천명했다.

 

3.1 독립 선언서
민족대표 33인이 조선제국이 주권을 가진 독립국임을 선언한 문서

 

3.1 운동 (1919년)
일제강점기에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벌인 비폭력 만세 운동

 

3.1 운동 주요 봉기도

 

3.1 운동 후 독립운동을 계속 확대해 나가기 위해 국내외에서 정부수립계획이 진행됐다.
국내에서는 한성정부의 출범이 선포됐고 연해주에서는 대한국민의회가,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이들 여러 임시정부는 곧바로 통합운동을 시작하여 마침내 1919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서울 - 한성 정부 (1919.4)
연해주 - 대한 국민 의회 (1919.3)
상하이 –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4)
지린 - 고려 임시 정부 (1919.4)
평양 - 신한민국 임시 정부 (1919.4)
서울 - 조선민국 임시 정부 (1919.4)
상해 - 통합 대한민국 임시 정부 (1919. 9)

 

초대 대통령에는 이승만, 국무총리에는 이동휘가 선임됐다.

 

이승만
이동휘

 

임시정부는 국내의 비밀연락망인 연통제 조직, 기관지 독립신문 발행, 각종 외교 선전활동 등을 전개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시베리아파와 상해파의 대립, 외교론과 무장투쟁론의 대립, 이승만과 안창호의 대립 등, 지도층간의 대립에 의해 혼란에 빠지고,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고 난 이후에는 급속히 세력이 약해졌다.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 창간호
1919년 10월 25일부터 제호를 [독립신문]으로 변경

 

‘대한공화국 대통령’ 이승만이 일본 국왕에 보낸 공문
(1919년 6월 18일)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

 

한편 3.1운동 후 나라 안에서는 경제, 문화 방면에서 민족의 힘을 키우려는 실력 양성 운동이 전개됐다.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그 시작으로 홍수처럼 밀려드는 일본상품에 맞서 토산품을 애용하자는 물산장려운동, 식민지 우민화 교육의 극복과 민족의 고등교육을 위한 민립대학설립운동과 문맹퇴치 운동이 전개됐다.

 

물산장려회가 들에서 싹이 나고 면화도 난다. 우리가 만들어서 우리가 쓰자!

 

조선물산장려를 독려하는 포스터

 

민립대학 설립운동
1920년대 초 한국인들이 스스로 대학을 설립하고자 일으킨 시민 사회운동

 

문맹 퇴치 운동 포스터

 

이러한 실력양성운동은 일제의 식민 통치에는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진 못했으나, 교육과 산업을 통해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데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3.1운동 이후 항일운동의 이념과 투쟁 방법을 둘러싸고 민족주의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서로 대립하면서 독립운동의 분열상이 나타났다.

 

우리 운동의 방향 (동아일보 1925년 9월 27일)
“지금 우리 사회에는 두 가지 조류가 있다. 하나는 민족주의 운동의 조류요, 또 하나는 사회주의 운동의 조류인가 한다.

 

이에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뛰어넘어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려는 민족 유일당 운동이 전개됐다.

 

“우리는 사활의 심절한 각오와 양심의 박급한 욕구를 느끼어 한국유일독립당의 촉성을 기하고 회를 발하여 선언하노라,“
- 한국유일독립당 상해 촉성회-

 

1927년 2월 ‘민족 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제휴하여 신간회를 조직했다.

 

민족주의로 발기된 신간회 강령 발표
-동아일보 1927년 1월 20일-

 

신간회 강령 주요내용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한다.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절 부인한다."

 

신간회는 지회 중심으로 활동하며 강연회, 연설회 등을 개최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언론. 출판의 자유, 청소년. 여성의 형평운동 지원, 근검절약운동 등을 전개하며 민족의 의사를 대변하는 대표기구로 자리 잡았다.

 

신간회 나주지회

 

신간회 안동지회

 

신간회 경성지회

 

근우회 발회식
한국 여성운동가들이 설립한 여성단체 / 신간회 외곽지원 단체

 

신간회 진주지회

 

그러나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대한 진상보고 민중대회‘를 열 것을 계획했다가, 조병옥, 이관용, 이원혁 등 주요 인사 44명이 체포되었고 이로 인해 신간회의 뿌리가 흔들리게 됐다.

 

1928년 신간회 주요 간부들

 

보안법을 적용하여 신간회 전국대회를 금지
-동아일보 1929년 2월-

 

조병옥
이관용

 

신간회 민중대회와 관련하여 구속된 신간회 간부들

 

그 사이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계급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4년만인 1931년 5월 신간회를 해소하였다.

 

평양 신간지회에서 해소론을 수가결
-1930. 12. 29. 조선일보-

 

신간회 해소를 결의한 신간회 본부 전체대회

 

또 1920년대에는 사회주의 사상이 널리 보급되면서 청년운동이 활발해졌다. 순종의 국장일인 1926년 6월 10일, 학생들이 장례행렬을 따라가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융희황제(순종) 국장 발인

 

6.10 만세 운동 현장

 

3.1운동이후 최대 규모의 항일민족운동인 광주학생 항일운동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노동단체 등이 합류하면서 투쟁을 더욱 조직적으로 발전시켰다.

 

광주지역 학생 비밀결사조직 ‘성진회’

 

광주 학생운동 당시 작성된 격문

 

사회주의사상의 영향으로 생존권 수호를 위한 소작인들의 농민운동도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장시간의 노동과 일본의 민족 차별적 학대 행위에 맞선 노동운동도 활발히 전개됐다.

 

1929년 원산 총파업 노동자들

 

3.1운동을 계기로 무장독립전쟁의 필요성이 제고되어 만주에 다수의 무장 독립군 단체가 설립됐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대한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이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편성해 1920년 6월 만주 봉오동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500여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신흥무관학교 학생들
1911년 설립된 신흥강습소가 신흥중학교를 거쳐 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변경

 

홍범도 / 대한독립군 사령관
안무 / 대한국민회군 사령관
최진동 / 군무도독부군 사령관

 

대한북로독군부 창설

 

봉오동 전투 (1920년 6월)
만주 봉오동에서 한국의 연합독립군단인 대한북로독군부가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

 

같은 해 10월 청산리 대첩이 벌어졌다.
김좌진을 중심으로 한 북로군정서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대한국민회군과 연합하여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맞아 6일 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청산리 대첩 (1920년 10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독립군 토벌을 위해 출병한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

 

김좌진 / 북로군정서 사령관

 

청산리 대첩 후 북로군정서와 김좌진

 

청산리 대첩 후 퇴각하고 있는 일본군

 

이처럼 국내외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던 독립운동은 민중의 항일의식과 대중의 잠재적인 힘을 일깨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보다 다양하고 단합적으로 전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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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20년대까지 서구 열강은 일본을 지원했다. 이런 상황 속에 한국이 독립하기는 어려웠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미국도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지 않았다.

 

민족자결주의 [우드로 윌슨 미 대통령 주창]
민족의식을 지닌 집단은 독자적인 국가를 형성하고 자신의 정부를 선택할 수 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영국과의 동맹을 구실로 참전하여 승전국이 됐다.

 

제 1차 세계대전
1914~1918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면서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해체시켰다.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가 새로 독립국이 됐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 민족자결주의는 승전국들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독일/폴란드/러시아/체코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헝가리/루마니아/이탈리아/유고슬라비아

 

제1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평화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파리 강화회의가 열렸다. 당시 김규식이 한국 대표로 활동했으나, 미국을 포함한 서구 열강은 강대국의 전후처리 문제에만 집중했다.

 

파리강화회의 1919. 1 ~ 1920. 1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이 연합국과 동맹국 간의 평화 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개최한 국제회의

 

김규식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했던 독립청원서

 

이성환 교수 / 계명대학교 국제학부 일본학과
그 당시에 동유럽을 중심으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었지만 아시아에는 그것이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아시아에 식민지를 많이 가지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가 반대를 했었고 그 다음 미국 역시도 필리핀을 식민지로 갖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시아 전체에 그것(민족자결주의)을 적용하기에는 미국도 상당히 부담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혜정 교수 / 중앙대학교 정치국제학부
당시의 국제적인 기준은 인종적인 편견과 제국주의가 기준이에요. 그리고 국제 정치의 냉엄한 현실에서 보면 한국이 독립을 할 수 있는 여건, 능력 아무것도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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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30년대 들어와 일본이 만주에 이어 화북, 화중 지역 등으로 침략을 확대하자 미국, 영국 등 서구 강국들과 일본 간의 밀월관계는 끝을 맺는다. 더불어 한국의 독립을 위한 새로운 국제적 기회가 조성됐다.

1930년대 초 대공황의 영향으로 국내외 정세가 혼란한 가운데 일본은 대륙 침략에서 활로를 찾았다.

 

대공황
1929년~39년 전 세계 산업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지속된 경기 침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1년 만에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사변 / 1931. 9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한 전쟁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대륙에 대한 침략을 더욱 확대했다. 일본은 화북을 필두로 화중을 거쳐 화남 지역까지 차례로 중국의 요지를 점령했다.

 

만주 / 베이징 / 남경 / 한국 / 일본 / 타이완

 

중일 전쟁 / 1937. 7. 7 발발
일본군이 화북, 화중, 화남 지방 등 중국 본토를 침략한 전쟁

 

일본의 침략은 유럽에서의 독일의 승리와 더불어 더 확대되었다. 1940년 6월 독일이 프랑스를 격파하고 유럽 대륙을 장악하자, 그해 9월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맺었다.

 

일본, 독일, 이탈리아 삼국동맹 체결 / 1940년 9월 27일

 

그 후 일본은 영국, 프랑스 등의 세력권이었던 동남아를 침략했다.
일본은 우선, 친독 비시 프랑스 정부가 관할하던 베트남을 점령했다.

 

버마 / 태국 / 베트남 / 말레이 반도 / 홍콩 / 타이완 / 필리핀

 

이에 미국과 일본의 갈등이 본격화했다. 미국은 일본에 대한 경제제재로서 석유와 철강 등의 수출을 금지했다. 그리고 중일전쟁 이전으로 되돌아가 중국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일본에게는 제국의 포기를 뜻했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미국과의 일전을 선택했다.

 

만주 / 베이징 / 남경 / 한국 / 일본 / 타이완

 

도조 히데키 / 일본 수상

 

일본은 하와이에 있는 미국의 태평양함대를 파괴하면, 동남아시아를 장악할 수 있고, 그 후 미국과 새로 협상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혜정 교수 / 중앙대학교 정치국제학부
남방에 있는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 있는 석유가 아주 구체적으로 필요한 거고 그럼 (일본이) 그쪽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미국하고는 협상의 가능성은 깨졌어요 그런데 미국의 군사력을 무력화시키지 않고 중립화시키지 않고 아래로 갈 수는 없어요. (미국이) 뒤에서 칠 테니까 그래서 나온 대안이 일단 하와이에 있는 태평양 함대를 무력화시키고 이쪽을 먹겠다는 식이 되는 거죠. 그래서 하와이를 공격한 겁니다.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 해군의 비행기들이 미국 하와이 주의 오아후 섬 진주만에 있는 미군기지에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공격을 했다.

 

진주만 공습 /1941. 12. 7
일본해군 연합함대가 미국 태평양 함대의 기지 진주만에 공습을 가한 사건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날을 치욕의 날로 선포한 뒤, 미국의회의 승인을 얻어 전쟁을 선포했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에 일본의 일방적이고 배신적인 공격이 개시된 이후, 미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전쟁 상태가 시작되었음을 의회에서 선언해 줄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태평양 전쟁의 막이 올랐고, 제2차 세계대전의 판도가 바뀌었다.

 

[게티스버그 타임즈] - 1941.12.8.-
일본 진주만 공격, 미국에 전쟁 선포!

[찰스턴 데일리 메일] - 1941.12.8. -
미국 전쟁상태 선포, 하와이에서 1500명 사망

[텔레그램 트리뷴] -1941.12.7.-
일본, 미국 상대로 전쟁 개시!

 

그때까지 미국은 무기대여법으로 연합국 측을 지원했지만, 독일 및 일본과 직접 전쟁을 하지는 않았다.

 

무기대여법 Lend-lease Act /1941. 3
제2차 대전 중 미국이 영국, 소련, 중국 등 연합국 측에 무기와 물자를 대여할 수 있게 한 법. 제2차대전 참전 반대 여론이 높았던 미국이 간접적으로 참전하는 효과를 냈다.

 

진주만 공격 후 영국이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독일이 미국에 선전 포고를 했다. 곧,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과 독일, 일본 등 추축국이 전면 전쟁에 들어갔다.

 

영국, 일본에 선전 포고
독일, 미국에 선전포고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 vs 추축국 (일본 / 독일 / 이탈리아)

 

이성환 교수 / 계명대학교 국제학부 일본학과
미국 국내에서는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를 했어요 미국 여론이요, 그래서 미국은 개입을 할 수 없었죠. 그런 상황에서 일본이 진주만 폭격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국으로서는 미국 국민들도 그렇고 미국이 전쟁을 할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일본이 결국은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였고 미국의 참전은 결과적으로 연합국의 승리를 가져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주만 기습 후 일본은 인도차이나와 말레이 반도를 넘어 인도네시아, 뉴기니로 침략을 확대해 나갔다.

 

버마/태국/베트남/말레이반도/싱가포르/동인도제도/홍콩/타이완/필리핀/뉴기니

 

1942년 2월까지 영국령의 말레이시아, 버마, 싱가포르를 차례로 점령했다. 그해 5월에는 북으로는 만주와 중국 전 연안지역, 남으로는 동남아시아 각국과 뉴기니, 그리고 하와이 서쪽의 남태평양 전역을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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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에 일본 군국주의가 승승장구하는 상황 속에서도 독립운동은 계속됐다.

1930년대 만주지역에서는 사회주의 계열의 무장독립운동이 크게 일어나 항일 중국군과 연합해 여러 차례 일본군을 격퇴하는 전과를 올렸다.

침체해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가장 적은 희생으로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는 투쟁 방법을 찾았고, 그 결과 1931년 상하이에서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이봉창 의사의 한인애국단 선서문
한인애국단 폭탄 제조기술자와 김구

 

한인애국단
일본제국의 주요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독립운동 조직

 

한인애국단은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의 폭탄 투하, 4월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하 등 개인열혈 투쟁으로 일본과 맞섰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거사는 독립운동에 큰 활력소가 되었다.

 

히로히토 일왕 암살을 시도한 이봉창의사 의거 현장

 

윤봉길의사 의거현장 / 상하이 홍커우 공원

 

윤봉길
이봉창

 

한편, 중국 관내의 한국 독립당과 의열단, 만주에서 이동해 온 독립운동 세력 등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정당, 단체들이 뭉쳐 1935년 민족혁명당을 결성했다. 김구 등 임시정부 고수파가 불참하고 일부 인사가 이탈하였지만, 독립운동의 통합을 시도한 의의가 있다.

 

조소앙 / 한국독립당
김두봉 / 한국독립당

 

윤세주 / 의열단
김원봉 / 의열단
박효삼 / 의열단

 

윤기섭 / 신한독립당
신익희 / 신한독립당
이청천 / 신한독립당

 

김규식 / 미주한인독립당
김학규 / 조선혁명당
최동오 / 조선혁명당

 

최창익 / 사회주의자
허정숙 / 사회주의자

 

민족혁명당 창당

 

민족 혁명당은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 아래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항일 투쟁에 나섰다. 이는 중국 관내 최초의 한인 무장부대였다.

 

조선의용대
대장 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주도로 결성된 독립군

 

조선의용대는 일본군에 대한 심리전이나 후방 공작 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 정부가 항일 투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좀 더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위해 대부분의 병력이 북상하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결성하고 호가장 전투, 반소탕전 등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장제스 / 중국 국민당 주석

 

만주에서는 1933년 젊은 사회주의자들이 중국공산당의 동북인민혁명군에 참여하였다. 1936년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된 이들은 함경도 국경지대에서 유격 활동을 펼쳤다. 1937년 6월 4일,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김일성이 이끄는 유격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함경남도 갑산군에 침투하여 경찰주재소 등을 공격하였다. 이후 일본 관동군은 만주의 항일 유격활동에 대한 공세를 크게 강화하였다. 이에 김일성과 그의 소규모 부대는 1941년 소련령으로 퇴각하였다.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 북만지역 지휘관들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대원들

 

1937년 동북항일연군 시절의 김일성 부대

 

보천보 경찰 주재소

 

보천보 전투로 불타고 있는 일제 기관들

 

기관총 가진 이백여 명 월경
보천보 시가를 습격 충화
주재소 우편소 보통학교 읍사무소에 방화
김일성파로 판명
- 1937.6.6. 동아일보-

 

조선 항일 단체를 토벌하기 위해 구성된 간도 특설대

 

1940년 김일성과 동북항일연군교도려

 

국내에서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여 민족문화수호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21년에 만들어진 조선어 연구회는 1931년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를 제정하고 우리말 큰 사전을 편찬했다.

 

황국신민서사

 

조선어연구회 회원들

 

1935년 조선표준어 사정회의 당시 조선어학회

 

한글 맞춤법 통일안 / 한국어 큰 사전

 

역사학 분야에서는 한국인의 시각에서 한국사를 보려고 하는 노력이 펼쳐졌다. 박은식, 신채호 등의 민족주의 사학, 한국인의 정신과 문화를 밝히려는 조선학운동, 사회주의 사관에서 한국사를 보려는 사회경제사학 등이 발전했다.

 

일제가 한민족 사서 20만권을 압수 소각했다는 주장
- 조선일보 1935년 10월 4일-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신채호 / 조선상고사

 

이병도
손진태

 

진단학보
한국인의 입장에서 한국사 연구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진단학회의 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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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일본이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키자, 한국의 독립운동은 군사 활동과 국제외교활동을 중심으로 활기를 띠었다.

우선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과 좌우합작이 이루어졌다. 1940년 5월 중국 관내의 민족주의 계열 3개 독립운동 단체가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만들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뒷받침했다.
임시정부는 9월 김구를 주석으로 선출하고 11월 건국강령을 발표했다.

 

한국 국민당 / 조선혁명당 / 한국독립당
한국독립당

 

김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선출 (1940.9.)

 

대한민국 건국강령 발표 (1940.11.)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광복군을 조직하여 3개 지대를 편성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조직 / 1940. 9

 

1941년 5월에는 김규식 등 중국 관내의 조선민족혁명당의 인사들과 사회주의계열 단체 인사들도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이로써 중국 관내 독립운동 단체들의 좌우합작이 이루어졌다.

 

중국 관내 독립운동의 좌우합작 / 1941. 5

 

또한 임시정부는 일본의 태평양전쟁 도발 다음날인 1941년 12월 9일 중국, 미국, 영국 등 반일 전선의 일원임을 자임하며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 선전포고 (1941.12.9.)

 

광복군은 1943년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버마 전선에 참전하였으며, 또 1945년에는 미육군 전략정보국과 제휴, 국내침투를 위한 특수부대를 편성해 국내 진공작전을 추진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버마전선 참전 (1943)

 

미육군 전략정보국과 제휴, 국내침투를 위한 특수부대 편성

 

미주의 한인들은 1941년 4월 하와이에서 통합된 운동기구로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결성하고, 외교기관으로 외교위원부를 조직 했다. 외교위원부 책임자로는 이승만이 임명됐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재정모금을 통해 임시정부의 활동과 외교활동을 후원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1941. 4
하와이에서 통합된 독립 운동기구

 

이승만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홍선표 책임연구위원 /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소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중경의 임시정부와 외교활동을 후원하는 강력한 독립운동 조직이 되었고 이승만을 위원장으로 하는 주미외교위원부는 임시정부의 승인외교와 미국의 lend-lease, 즉 군사지원법에 근거해서 임정에 대한 군사지원, 외교 활동에 주력을 합니다. 이런 미주 한인들의 노력과 후원, 적극적인 대미외교의 성과로 먼저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독자적인 힘으로 창설할 수 있게 됩니다.

 

미국의 이승만은 1942년 6월 VOA '미국의 소리' 라는 초단파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에게 일본의 패망과 조국의 광복을 예고하는 육성방송을 몇 주간에 걸쳐 전달했다.

 

이승만 박사가 고국의 동포들에게 보내는 육성방송 /1942. 6
VOA (미국의 소리) 초단파방송망

 

우리 독립의 서광이 비추나니 일심합력으로 왜적을 파하고....

 

이승만은 1941년 여름 뉴욕에서 출간한 [일본 내막기]라는 책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실체를 역사적으로 밝히고 일본이 곧 미국을 공격하게 될 것임을 경고한 바 있었다.

 

일본 내막기 / 이승만 저
1941년 뉴욕 출간

 

일본의 황도(皇道)와 전쟁심리
‘다나까’ 수기
일본 그 정체를 폭로하다.
중일전쟁의 시초

 

일본인의 정복행과 그 반향
미해군의 증강
일본의 선전은 저지되어야 한다

 

한편, 소련공산당 및 중국공산당과 함께 일본제국주의와 투쟁했던 세력도 있었다. 중국 화북지방에서는 1942년 사회주의 계열의 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됐다. 그 군사조직인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의 팔로군과 함께 일본군에 항전했다.

 

조선독립동맹 결성 (1942)

 

조선의용군

 

국내에서는 여운형이 1944년 8월 일본의 패망과 조국의 해방에 대비하기 위한 비밀조직으로 건국동맹을 조직했다.

 

여운형

 

건국동맹 / 1944. 8
여운형이 국내에서 결성한 비밀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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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한편 미국의 반격과 더불어 일본은 패망의 길로 내몰렸다. 미드웨이 해전 후 미국은 일본에 대해 본격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일본이 서태평양 남북 전역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공격은 남태평양의 솔로몬 군도에서부터 시작됐다.

 

뉴기니
솔로몬 제도
과달카날

 

1943년 2월, 미군은 솔로몬 군도의 동남쪽 끝에 있는 과달카날 섬에서 6개월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했다.

 

과달카날 전투 / 1942. 8. 7 ~ 1943. 2. 9
솔로몬 군도의 동남단 과달카날 섬에서 벌어진 미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
미군 반격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미군은 사이판, 유황도, 오키나와 등 태평양 상의 섬들을 따라 북상하면서 일본을 압박했다.

 

미드웨이 / 마샬군도 / 길버트 섬 / 이오지마 / 사이판
과달카날 / 솔로몬 제도 / 뉴기니 / 필리핀 / 타이완 / 일본 / 한국 / 남경
/ 베이징 / 만주 / 버마 / 태국 / 베트남 / 말레이 반도 / 싱가포르 / 동인도 제도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선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필요했다.

 

남경 / 베이징 / 만주 / 한국 / 일본

 

소련은 만주와 한반도를 통해 남하할 것이고, 미국은 남태평양에서부터 북상할 것이었다.

이 경우 한반도와 만주 등 과거 일본의 점령지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문제였다.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연합국의 공동관리 방침을 세웠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 미국 대통령

 

이것이 카이로선언으로 발표되었다.
1943년 11월, 미국,영국,중국의 세 지도자들은 카이로에 모여 전쟁의 원활한 수행 계획과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했다.

 

카이로회담 / 1943. 11. 22~11.27.
미국, 영국, 중국의 정상이 이집트 카이로에 모여 대일항전과 전후처리에 대해 논의한 회담

 

5박 6일간 이루어진 회담 내용은 1943년 12월 1일 카이로 선언이란 이름으로 전 세계에 발표된다.

 

카이로 선언 발표 / 1943. 12. 1

 

선언문에는 한국의 독립이 명시됐다.

 

“위의 3대국은 한국인의 노예상태를 유념하여 한국이 적절한 과정을 거쳐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가 될 것을 결정하였다”
-선언문 내용 中-

 

위의 3대국은 한국인의 노예상태를 유념하여 한국이 적절한 과정을 거쳐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가 될 것을 결정하였다.
이 문장의 핵심은 한국을 독립국으로 만들되 적절한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적절한 과정’이란 연합국의 공동 관리, 신탁통치를 뜻했다.
이것은 미국의 전후 세계질서 구상의 일부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독일과 일본을 꺾은 후 세계 질서를 완전히 재편하려 했다. 미국은 자신이 유일 패권국이 되고, 나머지 연합국들이 지역 영주가 되는 세계질서를 꿈꾸었다. 연합국들의 협력으로 더 이상의 세계전쟁을 막고 기존 식민지는 연합국의 공동관리, 신탁통치를 받게 하겠다는 것이 미국의 방침이었다.

 

이혜정 교수 / 중앙대학교 정치국제학부
미국의 고민은 일단 강대국들이 다 제국을 갖고 있는 거잖아요. 그러면 제국을 어떻게 순조롭게 해체할 것이냐.. 제국을 그대로 유지하게 두지는 않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민족자결주의로 바로 갈거냐.. 그러나 민족자결주의를 하게 되면 잘못하면 식민지 반제국 독립투쟁이 있어서 관리가 안 되는 거죠. 그 다음에 인종적인 편견도 있고요. 조선을 비롯해서 (식민지 국가들은) 자치 능력이 없다, 그게 기본적인 당시의 입장이니까. 한반도에 대한 공동 신탁통치에서 공동관리, 공동점령의 기본적인 구상은 굉장히 거시적인, 세계적인 차원에서 기존의 강대국, 제국들인데 이 제국을 어떻게 순조롭게 해체하고 관리할 거냐 하는 구상에서 나온 거다.. 그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카이로선언에서의 한국의 독립 약속이 나오는 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들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자유 독립’을 직접 거론한 이는 중국의 장제스 주석이었다. 그에게는 한국에 대한 중국의 전통적인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의도도 있었으나,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그동안 장제스에게 한국의 독립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호소한 것도 한몫했다.
카이로에서 미국은 이 한국 신탁통치안에 대해 영국과 중국의 동의를 얻었다.
카이로 회담에는 소련의 스탈린이 불참했다. 스탈린은 곧 이어 이란의 테헤란에서 열린 미. 영. 소 3국 정상회담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루스벨트는 한국의 신탁통치에 대해 스탈린의 동의를 얻었다.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수상

 

테헤란 회담 1943년 11월 28일~ 12월 1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열린 미, 영, 소 3국 수뇌회담.

 

1944년 6월 사이판을 점령한 미군은 1945년 2월 필리핀을 해방시켰다.

 

1944. 6
미군 사이판 점령

 

1945. 2
필리핀 해방

 

그리고 한 달 여 만에 일본 도쿄에서 1천여km 거리의, 도쿄와 사이판 사이 중앙에 있는 요충지 이오지마까지 점령했다.

 

일본 / 도쿄 / 이오지마

 

이오지마섬 전투
1945년 2월19일 미군 상륙, 36일 만에 미군 승리로 종결

 

이처럼 일본을 패전으로 몰아넣는 와중인 1945년 2월,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남쪽 해안에 위치한 휴양지, 얄타에서 미국과 영국, 소련 지도자들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얄타회담 1945. 2. 4 ~ 2. 11
소련 흑해 연안에 있는 얄타에서 미국·영국·소련의 수뇌자들이 모여 독일을 패배시키고 그 후를 의논하기 위한 회담

 

이 회담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도 논의되었다.

 

김영웅 소장 /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극동연구소
소련은 아직 유럽에서 독일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아서 극동지방으로 많은 군대를 보낼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짚고 가야 할 것은 소련은 군인, 시민들을 포함해서 총 2,700만 명의 희생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련의 입장에서는 일본과의 전쟁이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소련에겐 연합국의 의무가 있었습니다. 소련은 독일과 일본에 대항해 군사적 지원을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련은 대일전에 참전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미, 영, 소 정상은 소련군이 대일전에 참전하는 조건을 흥정했다. 3국 정상은 소련이 쿠릴열도와 사할린 영유권 등 1905년 러일전쟁 패배 후 일본에 빼앗긴 모든 권리를 돌려받는다는 데 합의했다. 그리고 한국의 신탁통치안도 세 정상 사이에서 재확인됐다. 이때 루스벨트는 신탁통치 실시기간에 대해 20~30년은 필요할 것이라 했으나, 스탈린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고 응대했다.

 

얄타회담(1945.2)에서의 극동 문제 논의
소련은 독일 항복 후 3개월 내에 대일 전쟁에 참여.
그 대신 러일전쟁 때 일본에 잃은 사할린 남부와 쿠릴 열도 등의 영토를 회복.
홋카이도 분할 점령 등 일본 점령에 참여,
한국에 대한 공동신탁통치 재확인

 

프랭클린 루스벨트 / 미국 대통령
한국의 신탁통치 기간은 20~30년은 필요하다.

 

이오시프 스탈린 / 소련 수상
한국의 신탁통치 기간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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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945년 4월,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뇌출혈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부통령이었던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1945년 4월 12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사망

 

해리 S. 트루먼 미국 부통령
대통령직 승계

 

그런데 트루먼은 전임자인 루스벨트와 스탈린 사이에 어떤 약속이 오갔는지를 몰랐다. 또, 소련과의 협조관계를 중시한 루스벨트와 달리 트루먼은 소련을 견제의 대상으로 여겼다. 일본 항복 문제를 다룬 1945년 7월의 포츠담회담에서 트루먼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 시 얻을 전리품에 관한 논의를 회피했다. 오히려 그는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하기 전에 일본의 항복을 받고자 했다.

 

포츠담 회담 (1945.7.17.~8.2)
독일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3개국 정상이 모여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결정하기 위한 회담

 

일본을 단번에 항복시키기 위해, 1945년 8월 6일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이혜정 교수/ 중앙대학교 국제정치학부
(미국이)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는 걸 보면서 스탈린이 생각을 완전히 바꿔요. 미국이 여기서 떠나지 않을 것이구나, 이건 장기전이다.. 양쪽이 다, 그러니까 미국 입장에서도 소련이 순순히 물러나지 않고 위성국가를 건설하는구나, 스탈린 입장에서도 미국이 독일, 일본에 대한 전후 재건 관리에 들어가는구나 해서 히로시마에 폭탄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대일 참전 선언을 하고, 그리고 미국이 계속 얘기해요. 일본 홋카이도를 우리가 무장해제시키겠다고 미국이 확실하게 얘기해요. 일본 전 국토는 우리가 단독으로 점령한다, 형식상으로는 연합국이 점령하는 건데 미국이 단독으로 점령하는 걸로 바뀝니다.

 

참전을 미뤄왔던 소련은 원자폭탄이 터진 직후인 8월 8일, 재빨리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와 한반도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1945.8.8.
소련, 대일 선전포고

 

만주 / 한국 / 일본 / 베이징 / 남경

 

소련의 공격에 더하여 미국이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하나 더 투하하자, 마침내 일본은 8월 11일 항복의사를 통지한다.

 

1945.8.9.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1945.8.11.
일본, 항복의사 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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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일본이 항복의사를 통지하자 미국이 다급해졌다. 미군이 소련군에 비해 만주와 한반도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군은 만주로 진입하는 한편, 8월 9일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에 들어왔다. 소련군은 9일 경흥, 12일 웅기, 14일에는 나진을 점령했다.
반면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미군은 거리가 1천km나 떨어져 있는 오키나와에 있었다.
아무리 미군이 서둘러 한반도로 이동한다고 해도 소련의 한반도 전역 점령을 막기 어려웠다.

 

한국 / 일본 / 만주 / 베이징 / 남경 / 오키나와 / 타이완
8.9 두만강
8.9 경흥
8.12 웅기
8.14 나진

 

이에 미국은 자신과 소련이 한반도를 나누어 점령할 군사 분계선을 긋기로 했다.
8월 14일 미국은 38도선을 분할 점령선으로 결정하고 소련에 제안했다. 소련은 그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당시 소련군의 진군 속도로 볼 때 소련은 미국의 38도선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지만 선선히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과연 그 속내가 무엇이었을까?

 

신복룡 전 석좌교수 /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스탈린은 차라리 일본을 분할점령하고 싶어 했던 것이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여건으로 볼 때 소련은 핵무기라든가 또는 근접선이라든가 맥아더의 단호한 의지, 이것에 감당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의지가 너무도 단호하게 저항적이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양보를 하고 한반도에서 북한을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로선 사할린과 북방 4개 열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하게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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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945년 8월 15일 오전, 당시 서울 거리는 유난히 조용했다.

 

1945년 8월 15일 서울

 

모든 한국인들의 눈과 귀는 일제히 라디오에 쏠려 있었다.
그토록 기다려온 해방인데도 국민들은 조용했다.

 

박성수 명예교수 / 한국학중앙연구원 (1931년생)
내가 직접 들었어요. 그때 (항복선언) 방송을 들었어요. 그저 항복했다는 것만 알았어요.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어. 그것(항복)을 15일에 발표했지만 우리는 15일에 몰랐고 16일에 가서 겨우 벽보를 통해서 알았죠. 해방이 됐다는 걸.

 

이튿날 오전에는 서대문형무소 등 감옥에 갇혀 있던 정치사범들이 풀려났다.
그제야 사람들은 해방을 실감했고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누군가는 일장기에 태극기를 그려 해방의 감격을 누렸고 누군가는 집에서 하루 종일 태극기를 그려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거리가 온통 태극기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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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38선 분할 점령 결정 이후 소련의 행동은 빨랐다.

 

1945.8.24.
소련군의 북한 진주 (평양)

 

곧바로 38선 지역에 경비부대를 배치해 철도와 전화, 전신을 차단하고 주민의 통행을 제한했다. 소련군의 38선 봉쇄는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단행됐다.

 

소련 38선 지역 경비부대 배치
철도, 전화, 전신 차단
주민 통행 제한

 

뒤늦게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소련군에게 38선 봉쇄를 해제하고 남북한의 행정을 통일적으로 실시하기 위한 협상을 하자고 3차례나 제안했으나 소련군은 이를 거절했다.

 

1945.9.8.
미군의 남한 진주 (1945.9.8. 인천, 9.9 서울)

 

양동안 명예교수 / 한국학중앙연구원
소련은 유럽에서도 미국과 분할점령을 했습니다. 유럽의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분할 점령했습니다. 그런데 유럽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점령한 후에 바로 봉쇄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독일은 48년부터 봉쇄를 했고 오스트리아에서는 55년에 철수할 때까지 점령 작전 분계선 지역을 봉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는 38선을 점령하자마자 봉쇄해 버렸습니다. 이런 소련군의 한반도에서의 행동거지는 소련이 2차대전 후 미국과 분할지역 점령한 다른 지역보다도 특히 한반도에서만은 점령한 지역을 공산화하려는 목적을 강력하게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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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러던 중 한반도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벌어진다.

 

재연

 

1945년 9월 영국 런던에서 5개 전승국 미국, 영국, 소련, 중국, 프랑스 외무장관들이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주역은 미국,영국,소련 3국의 외무장관이었다.

 

런던 외무장관회담 / 1945.9.12~10.2

 

미국과 영국은 소련이 동유럽 각국을 위성 공산국가로 만드는 것에 불만이었다. 반면 소련은 영국과 미국이 지중해지역과 일본을 독점하려는 것을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이 회의에서 소련은 일본에 대한 통치 참여와 지중해 진출을 위한 터키 다르다넬스해협의 자유통항권, 리비아의 트리폴리타니아 지역의 할양을 요구했지만, 미국과 영국은 이를 거절했다.

 

일본 / 한국 / 만주
흑해 / 다르다넬스 해협 / 트리폴리타니아

 

소련의 요구사항
첫째, 일본에 대한 통치 참여
둘째, 터키 다르다넬스해협 자유통항권
셋째, 리비아 트리폴리타니아 지역 할양

 

이 회의에서 미국-소련의 협조 관계에 큰 균열이 왔다. 이후 스탈린은 동아시아의 공산화 정책을 본격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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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첫째로, 외무장관회의가 한창인 9월 20일, 스탈린은 극동 주둔 소련군에 비밀 훈령을 내린다.
그 핵심은 북조선지역에 반일적인 정당, 단체들의 광범위한 블록을 기초로 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는 내용이었다. 즉, 북한을 단위로 하는 정권을 세우라는 것이었다.

 

북조선지역에 반일적인 정당, 단체들의 광범위한 블록을 기초로 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

 

둘째로,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에게 국공내전을 다시 시작하라고 지령한다.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 / 국민대학교 국제학부
그때 냉전 시대는 막 시작됐습니다. 타협, 협력에 대한 희망이 없어졌습니다.
동유럽에서도 아시아에서도 친소련 정권을 사실상 키우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45년 12월, 북한의 정치공작을 총괄하던 소련군 총정치국장 쉬킨 대장은 보고서에서 토지개혁과 같은 부르주아 민주개혁을 하루 빨리 실시할 것, 소련의 이익을 보장할 정치세력을 조속히 만들 것, 중앙집권적 권력체제를 시급히 창출할 것을 제창했다.

 

토지개혁과 같은 부르주아 민주개혁을 하루 빨리 실시할 것
소련의 이익을 보장할 정치세력을 조속히 만들 것
중앙집권적 권력체제를 시급히 창출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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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북한에 독자적인 정부가 세워진다는 것을 뜻했다.
이를 위해 소련은 9월 김일성을 입북시키고, 평양에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조직했다. 소련은 서울의 조선공산당을 거치지 않고 직접 북한 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을 지휘하고자 했다. 소련은 평양에 독자적인 공산당을 만들고자 했으나, 한 나라에는 하나의 공산당을 둔다는 1국1당주의 원칙 때문에 분국의 형식으로 북한 지역의 공산당을 조직했다. 평양의 이 분국은 박헌영이 이끄는 서울의 조선공산당으로부터 사실상 독립적인 기관이었다.

 

김일성 입북 / 1945. 9. 19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조직 / 1945. 10. 10

 

박헌영 / 조선공산당 최고 지도자

 

1945년 12월 북조선분국은 북조선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꾸기로 결의하고 김일성이 책임비서직을 맡았다. 북한의 공산당이 서울의 조선공산당으로부터 독립해 있으며, 소련은 김일성을 선택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북조선분국에서 북조선공산당으로 명칭 변경 결의
1945. 12

 

김일성 책임비서로 선출

 

1946년 2월, 소련군과 북조선공산당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설립하고 위원장에 김일성을 선임했다. 이는 북한에서 법령을 제정하고 집행하는 중앙행정 주권기관, 즉 사실상의 단독정부였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설립/ 1946. 2. 8

 

위원장에 김일성 선임

 

그 첫 사업은 북한의 재산권제도와 사회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꾼 토지개혁이었다.

 

북한의 토지개혁 / 1946년 3월 시행
지주의 토지를 대가 없이 몰수, 농민에게 무상 분배
지주들은 거주지로부터 추방

 

1946년 3월, 북한 정권은 지주의 토지를 대가 없이 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는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토지개혁은 20일 만에 종료되었는데, 지주들은 토지를 빼앗기고 거주지로부터 추방됐다. 토지개혁의 실무를 맡은 농촌위원회 위원 9만 여명은 북조선공산당에 가입해 북한 사회주의체제의 확고한 기반이 됐다.
토지개혁은 응당 필요한 일이었으나, 이는 통일 정부가 수립된 후 국민적 합의에 따라 진행했어야 할 일이었다.
소련은 토지개혁에 이어 사회개혁도 단행했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친일파, 반동분자, 반민주분자라 하여 숙청했고 1946년 8월에는 북한 중요 산업시설의 90%를 국유화했다.

 

북한의 사회개혁
공산주의 반대인사들 숙청
중요 산업시설의 90%를 국유화

 

안찬일 소장 / 세계북한연구센터
토지개혁이 실시된 것 자체로 토지가 농민들에게 다 돌아가고 그와 함께 산업 국유화 법령이 나와서 공장 기업소가 노동자들에게 돌아간 그 상태만 해도 이미 사실은 사회주의화됐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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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처럼 북한이 사회주의화의 방향으로 빠르게 개조된 것과 달리 남한은 아직 방향을 잡지 못하였다.
미군의 남한 진주는 소련군의 북한 진주보다 훨씬 늦었으며 이승만과 김구 등 주요 정치지도자들의 귀국도 늦었다.
무엇보다 미군정은 남한에 새로운 통치질서를 수립하기보다는, 한국 문제에 관한 연합국측의 결정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며 현상을 유지하는 정책을 취했다.
이처럼 남북간에 엇갈린 정세 전개로 인해, 해방 후 몇 개월 만에 한반도는 짙은 안개로 뒤덮였다.

 

과연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우리에겐 또 한 번의 용기와 지혜가 필요했다.

 

해방 후 독자적인 노선을 선택한 북한
통일 정부를 수립할 길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