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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현대사를 말하다


프롤로그 


“여보세요?” “Hello?” “もしもし” “Allô?” “喂”.....
 

세계 많은 사람들이 전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휴대전화 가입자 수가 인구수보다도 많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문자를 보내고, 통화를 하고, 숨 가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새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전화. 그 전화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전화, 최초의 기록 


우리나라 전화사용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대한제국의 외교를 담당했던 외부의 일기에 남아있는데요.
광무 2년, 즉 1898년 1월 24일자에 보면, 당시 통화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외국 함대가 나타났다”
 

기록에 등장하는 덕률풍은 바로 전화를 의미하는데요. 전화의 영어표현인 텔레폰을 한자음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렇게 전화로 인천 감리서에서 개항장의 상황을 서울 경운궁에 있는 고종황제와 관리들에게 보고한 것입니다.
 

당시로선 최첨단 기술이었던 전화.
19세기 중엽 사람의 목소리를 멀리 보내기 위해 여러 발명가들이 앞 다퉈 연구를 했고, 1876년, 벨이 전화기에 대한 특허를 얻었는데, 그로부터 6년 후, 우리나라에도 들어왔습니다.
조선 정부는 개항 후 새로운 제도와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청과 일본, 미국등지에 인재를 파견했는데, 청나라로 간 유학생이 전화기를 가지고 귀국 한 것입니다.
 

이렇게 도입된 전화는 궁에서 먼저 사용했습니다.
당시 신하들은 고종황제와 통화하기 전에 4번 큰 절을 했다고 하는데요. 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에 예를 갖추었던 것이죠.
 

궁밖에 일반인이 전화를 사용하기 시작한건 몇 해가 지난 1902년부터입니다. 하지만 비싼 요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진 못했습니다.
 


전신, 근대 통신의 시작 


외국의 새로운 문물이 물밀 듯이 들어오던 개항기. 전화와 함께 들어온 것이 바로 전신입니다.
전신은 미국의 발명가 새뮤얼 모스가 전신기를 발명하면서부터 널리 사용하게 됐는데요. 길고 짧은 신호음으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예를 들면, (소리 듣고) 는 A, (소리 듣고) 는 B. 그리고 이렇게 신호음에 따라 받아 적은 내용을 전보라고 합니다.
처음에 전보는 영문, 불문, 한문으로 작성했는데, 1888년부터는 한글전보도 가능했습니다. 한글 전보가 가능해지면서 한문과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들도 전보를 받아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신은 대북전신회사라는 덴마크 회사에 의해 설치됐습니다.
아시아에서 전신 사업을 독점하려던 이 회사는 바다 속에 전신선을 깔아 1884년 부산과 일본 나가사키를 연결시켰습니다. 일본 나가사키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중국 상하이와도 해저 전신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로써 조선도 세계 전신망에 편입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전신이 설치되자 일본은 부산에 전신 사무소를 두고 조선의 상황을 본국에 신속히 알리는 등 한반도 침략 목적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한편, 임오군란을 진압한 청나라 역시 한반도 지배 야욕을 드러냈는데요. 1885년 인천에서 서울을 거쳐 의주까지 서로전선을 설치하고 이를 청국의 전신과 연결시켰습니다. 그리고 한성전보총국을 설치하며 통신 장악에 나섰습니다.
 

비록 시작은 다른 나라에 의해서였지만 이를 계기로 조선정부는 1888년 서울-부산 간 남로전선을, 이어서 서울-원산 간 북로전선을 가설하였고, 조선전보총국, 다시 통신원을 설립해 전신을 독자적으로 운영했습니다.
 

이렇게 설치된 전신과 전화는 우리나라의 군사, 행정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요. 이전의 통신체제였던 봉수, 파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편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신은 전신 기계를 다룰 수 있는 사람에 의존해야 했고 전보를 받더라도 글을 모르면 곤란했습니다.
그에 반해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도, 기술이 없는 사람도 편하게 쓸 수 있는 전화!
전화의 등장은 우리 삶의 커다란 변화를 예고했습니다.
 


전화, 식민지 지배 수단 


한반도 지배를 둘러싸고 벌어진 청일전쟁, 그리고 러일전쟁. 일본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통신시설을 먼저 장악했고, 결국 두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승전국 일본은 1907년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 시켰으며 한국 군대를 해산시켰습니다.
우리 민족은 대규모 의병을 일으켰고 일제 강제 병합이후에는 전국적으로 3.1 운동을 벌이며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러자 일제는 우리민족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위해 전국에 있는 헌병대, 경찰서에 전화를 설치합니다.
이른바 경비 전화였습니다. 그 전화망은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촘촘히 퍼져나갔고, 감시는 더욱 더 강화됐습니다.
 

한편 경비전화에 비해 우선순위에서 밀려났지만 기업, 상점을 중심으로 전화가 설치되었고 전화사용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전화가입자 대부분은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이었습니다. 1941년 한국인 가입자는 30%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일제의 지배를 받게 된 한국의 현실은 이처럼 전화가입자수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전화의 시작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다시 남과 북으로 분단됩니다.
전화선도 끊어져 헤어진 가족들은 더 이상 전화로 소식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6·25전쟁은 통신시설의 80%를 파괴해 버렸습니다. 폐허가 된 통신망은 휴전 후 미국의 원조로 본격적으로 복구되기 시작했습니다.
 

 


대한뉴스 1958년

“체신부에서는 근본 ICA자금 160만 달러와 통화와 한화 410만원을 들여서 서울 시내의 전화 회선 8,500개 회선을 더 늘리는 한편 대대적인 보수와 배치공사가…”

 

 

그리고 1957년이 되어서야 겨우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전화는 어떤 변화를 거쳐 왔을까요?
 

처음 사용된 전화는 지금과 달리 전화 교환원이 꼭 있어야하는 수동식 전화였습니다.
수동식 전화기에는 자석식, 공전식이 있는데, 자석식 전화기는 전화기에 붙어 있는 자석발전기를 손으로 돌려야 했습니다.
이때 교환원이 발생한 신호를 보고 통화를 원하는 상대방을 물어 본 후에 전화선을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그 다음 개발된 공전식 전화기는 전화를 거는 사람이 수화기를 들면 곧바로 교환원에게 신호가 갔고, 그러면 교환원이 상대방을 물어본 후 연결시켜주었습니다.
 

한편, 전화교환기는 수동식 교환기에서 교환원이 필요 없는 기계식 자동교환기 그리고 전자교환기로 발전해 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대에 기계식 자동교환기가 본격적으로 확산됐는데 수동식 교환기로는 늘어나는 전화수요를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전화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1960년 우리나라 인구 천 명당 겨우 4대의 전화가 보급되었을 뿐입니다.
그나마 전화를 걸고 받을 수 있었던 곳 중의 하나가 다방이었습니다. 당시 다방은 차를 마시는 만남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일을 하는 사무실이자 연락처였습니다.
 

 


박경환 82세

“사업하는 사람들은 연락처가 없으니까 다방으로 연락하면 (연결해주고), 다방에 하도 드나드니까 누구인지 다 알아서 다방 마담이 연락도 받아주고…”

 

 

전화가 필요했던 사람들은 전화를 걸고, 받기 위해 다방으로 모여들었던 거죠.
 

한편, 전화를 간단히 사용하자는 공익광고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공익광고 1961년

“통화중이군요. 기차시간이 임박했는데 누가 이 여인의 긴박한 전화를 가로막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여기군요. 새로 해 입은 옷자랑을 무려 2분이나 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입니다.”

 

 


대한뉴스 1962년

“체신부에서는 내년 정월 초하루부터 전국 자동전화에 대한 요금 제도를 지금까지의 규율제로부터 도수제로 변경 실시합니다.”

 

 

이처럼 전화 이용이 증가하자 모든 전화에 똑같은 요금을 부과했던 정액제가 통화 횟수에 따라 요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자 전화요금을 아끼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이 등장했습니다.
 

 


이기열 작가 / 『정보통신 역사기행』 저자

“어떤 곳은 ‘고장’이라는 딱지를 써서 전화기에 붙여 놓기도 하고 다이얼에다가 자물쇠를 채워 놓기도 하는 그런 현상들이 생겼어요. 그래서 ‘전화는 아껴쓰고 통화는 간단히’라는 표어를 내걸었던 시절이 있었죠.”

 

 


김복 78세

“서울 전화는 (요금이) 얼마나 비싸. 지방 사람들이 사용하려면 비싸잖아. 그러면 (사용 못하게) 잠가놨어요. 이렇게 열쇠(로 묶고) 철사로 꾀어가지고 잠가놓고 가. 못 돌리게... 다이얼 안돌아가게.”

 

 

전화요금이 비쌌던 시절, 인심도 넉넉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전화, 권력과 부의 상징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되고, 제1차 통신 산업 5개년계획도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그 첫 번째가 그동안 수입해 사용했던 전화기를 국산화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정부는 체신 1호라는 전화기 표준규격을 만들었고, 기업들은 국산 전화기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화기 생산은 늘었지만, 여전히 전화교환기의 생산과 설치가 늦어지면서 사람들은 전화가설을 신청 한 후에 몇 년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김충엽 77세

“그때 전화를 먼저 놓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선이 많지 않으니까 그때 (전화를) 놓기가 힘들었지. 그래서 배경이 있는 사람들은 빨리 놓고 그랬었지. 그리고 또 영업하는 사람은 우선으로 해줬고.”

 

 

1961년부터 정부는 우선순위를 정해 공익상 중요한 곳에 먼저 설치를 했고, 일부는 공정성을 위해 전화청약 공개추첨을 실시했습니다.
공개추첨이 있는 날에는 수백 명이 모여들 정도였습니다. 추첨에 떨어진 사람들은 이미 설치된 전화를 사들여 자기 집이나 사무실로 이전했습니다.
전화는, 가격이 점점 올랐고 결국 웃돈 주고 사고파는 투기의 대상까지 되었습니다.
 

투기를 막고자 기존에 가설된 전화의 거래는 내버려두더라도 신설 전화의 거래는 금지시키기로 합니다. 그러면서 전화는 사고팔 수 있는 전화와 사고팔 수 없는 전화로 구분되었습니다.
 

이른바 백색전화와 청색전화의 탄생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투기를 더욱 부추기는 상황이 됐습니다.
사고 팔 수 있는 백색전화의 가격은 계속 올라, 집 한 채 값과 비슷할 정도였습니다.
 

 


양승택 TDX 전 개발단장

“(그때는) 전화를 한 번 신청하면 3년 이상 걸려야 전화 한 때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 말에는) 인구 100인당 6대 정도밖에 전화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전화 한 대 값이 어느 정도로 비쌌느냐면 그때 압구정동 아파트 한 채 값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 정도로 전화가 비쌌습니다.”

 

 

심지어 전화를 빌려주고 월세를 받는 전화임대업까지 등장할 정도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게다가 어렵게 설치한 전화라도 요즘처럼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종희 전 전화교환원

“날씨가 안 좋거나 하면 (전화통화가) 끊어지는 수도 있고 (소리가) 안 들린다고 그러는 전화도 많았고, 그때는 지금 같이 잘 안 들렸어요. 어떤 때는 (전화가) 2,3일씩 안 되는 데가 있어요. 시골 같은 데는 빨리 못 고치면 사람이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선이) 어디가 끊어졌나 확인을 해야 해요. 그러면 20,30리 길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줄을 쫓아서 가요. (끊어진 데를) 못 찾으면 2,3일씩 걸린 적도 있어요.”

 

 

전화에 대한 불만은 컸고 그 불만은 1980년대 초까지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함께 쓰는 전화 


지금 우리가 종종 볼 수 있는 공중전화.
우리나라에 공중용 전화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02년입니다. 서울과 인천 사이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당시는 ‘장리’라는 관리인이 있어 전화내용을 감시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지금과 같은 옥외 무인공중전화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관청 옆이나 경찰서 근처에 설치된 적이 있었고, 광복 이후에는 1962년, 서울 시청 앞과 화신백화점에 등장했습니다.
 

영화 속에도 단골로 등장한 공중전화. 집집마다 전화가 없었던 시절, 전화를 걸기 위한 사람들로 공중전화박스 앞은 늘 붐볐습니다. 공중전화는 서민들에겐 유용한 물건이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공동전화도 등장합니다. 하나의 전화선으로 여러 가입자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을 공동전화라고 하는데, 새마을 운동의 일환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공동전화는 아니지만, 누군가 자기 집에 전화를 설치하게 되면 그 전화는 종종 동네 사람들의 전화가 되곤 했습니다.
 

 


이종희 전 전화교환원

“시골 같은 데는 이장님 집에나 한 대 있으면 몇 백 가구가 그 집으로 다 비상연락을 했다시피 그렇게 했지요.”

 

 

이장 집에 전화가 걸려오면, 이장은 확성기로 전화 온 사람의 이름을 불렸고, 그러면 달려와 전화를 받았습니다.
 

미안하고 불편했지만, 그래도 떨어져 있는 가족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그래도 떨어져 있는 가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설레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우체국에 가서 전보나 편지를 부치는 대신 전화로 소식을 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가구 1전화 시대 


1970년대 고도성장을 이룬 한국,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소득이 증가하자 전화를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났습니다.
1970년대 시내전화 수급상황을 보면 전화 가설이 빠르게 증가했지만, 전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역시 늘어나 전화청약이 밀리는 상황은 계속 늘어만 갔습니다.
 

늦어지는 전화 설치와 낮은 통화품질을 해결하는 방법은 교환기를 대폭 늘리는 것!
그것도 기존의 기계식 자동교환기 대신에 전자교환기를 설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정부는 우선 급한 대로 해외로부터 기술을 도입해 전자교환기를 생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기술 도입에 따른 경제적 부담도 있고, 언제까지나 외국에 의존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정부는 더 나은 기술의 전자교환기를 자체 개발할 것도 함께 결정했습니다. 1976년의 일이었습니다.
 

다음해인 1977년, 정부는 한국통신기술연구소를 설립해 연구를 시작했고, 1981년 국산 전자 교환기 TDX 개발 사업단을 꾸려 본격적인 개발을 추진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의 연구비를 지원할 만큼 중대한 사업이었습니다.
 

몇몇 선진국만 보유한 기술을 자체적으로 개발할 수 있겠냐는 우려도 컸지만 1986년 마침내 한국형 전자교환기 첫 모델인 TDX-1 개발에 성공,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열 번째로 전자교환기 생산국이 됐습니다.
정부가 국책연구소를 설립해 기술 능력을 축적하고 기업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조를 이끌어 낸 결과였습니다.
 

 


양승택 TDX 전 개발단장

“세계에서 그 교환기를 자체개발하면 선진국이 되는 (그 정도 중요한 기술이었습니다.) TDX 개발을 혼자서 한 게 아니고 300명 이상의 연구원이 있었고 그리고 또 기업에서 50명씩 해서 200명이 들어오면서 500명 이상이 이거(TDX 개발)를 5년 동안 한 거예요.”

 

 


이정욱 전 KT 부사장

“이것이 우리나라의 통신 시설을 확장하는 인프라가 됐고 그 기반 하에서 오늘 날 IT가 발전했다고 생각합니다.”

 

 

TDX 개발에 힘입어 우리나라는 1987년 천만회선을 돌파하면서 1가구 1전화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로써 전화는 더 이상 권력이나 부의 상징이 아닌 생활필수품이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집, 또는 사무실에서 전화로 일을 보거나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집 전화 덕분에 떨어져 있는 친구, 가족과 수다를 떨며 소소한 일상까지 공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용건만 간단히’의 시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1인 1전화 시대 


삐삐라고 불렸던 무선호출기.
1990년대 초 사람들의 일상은 크게 변했습니다. 사람들은 전화로 호출번호를 남기거나 음성메시지를 녹음했고, 전화로 메시지를 확인하고 응답했습니다. 그만큼 전화는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당시 공중전화 사용도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삐삐에 이어 등장한 휴대전화기.
처음 나온 휴대전화는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무겁고 컸습니다.
 

서울 올림픽이 개최된 1988년은 국산 휴대전화가 처음 등장한 해이기도 합니다.
올림픽 IOC위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마흔 일곱 대가 만들어졌고, 1년 뒤 대중에게도 판매됐습니다. 하지만, 고가의 전화기와 비싼 통신료로 휴대전화는 소수만의 전화였습니다.
 

그러던 중 1990년대 중반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996년, 실험단계에 있던 CDMA 방식의 디지털 이동통신 기술을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한 것입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소가 미국 벤처기업 퀄컴의 기술을 적극 활용하고 국내 굴지의 기업들이 개발에 참여해 얻어낸 성과였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우리나라 휴대전화를 구입했고, 세계 사람들도 우리 제품을 사용했습니다. 삐삐는 추억 속으로 사라져 갔고 휴대전화는 세상의 그 어떤 물건보다도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이제 전화는 집에 있는 것, 가족의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손안에 있는, 내 것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전화를 가지고 다니면서 언제 어디서나 통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인 1전화 시대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하나, 둘, 또 다른 변화들이 나타납니다.
 

그 시작은 문자 메시지. 이제 전화기는 글을 통한 소통까지 담당하게 됐습니다. 또한 일대일 소통이 아닌 일대 다수의 소통까지도 가능해지면서 다양한 소통문화가 만들어졌습니다. 멀리 있어 볼 수 없는, 그리운 이의 얼굴을 보면서 통화할 수도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등장한 손 안의 컴퓨터 스마트폰. 서로 다른 곳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소통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많은 기능, 더 많은 정보, 새로운 소통방식.
사람들의 일상은 전화기로 인해 빠르게 변해 가고 있습니다.
 


에필로그 


새로운 시대, 문명의 상징으로 들어와, 제국주의 지배의 도구가 되었으며, 부와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던 전화.
이제는 생필품이 되었을 뿐 아니라 다양한 기능으로 전화기라는 이름도 어색해진 스마트폰.
우리는 그 똑똑한 전화기로 데이터를 주고받으며, SNS를 통해 예전보다 더 빠르게,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130년 전 우리 곁으로 와, 사람들의 소통을 변화시킨 전화.
130년 후에도 우리 곁에 있을까요? 앞으로 우리의 소통은 어떻게 변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