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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대한민국 정부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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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역사박물관 현대사 교육 영상 자료 2

 

대한민국 정부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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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침내 그날이 왔다.
나라 잃은 설움과 고통을 견뎌온 치욕의 36년.
한반도는 내 나라, 내 땅에서 열릴 새 날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그 희망의 싹을 틔울 지도자들이 한국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다.

 

1945. 8. 15
해방

 

첫 번째 인물은 국내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가이자 정치가, 여운형이었다.

 

여운형

 

일왕의 항복 직전인 1945년 8월 15일 아침, 조선총독부로부터 일본인들의 안전 보장과 혼란 방지를 부탁받은 여운형은 정치범 석방 등을 조건으로 내걸고 이를 수락했다.

 

1945. 8. 15
일왕 항복 선언 방송

 

여운형은 다음날인 1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약칭 건준을 조직해 각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며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준비했다.

서울의 건준 중앙조직은 좌파와 중도파 인물들로 구성됐다.

 

재연

 

1945. 8. 16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발족

 

그런데 8월 말 9월 초에 걸쳐 공산주의자들이 건준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은 박헌영이었다.

박헌영은 일제 말에 전향하지 않은 공산주의자로, 해방 후 곧바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했다.

 

박헌영

 

공산주의자들이 건준을 장악하자 일부 중도파는 건준에서 떨어져 나갔다.

 

재연

 

공산주의자들은 미군이 한반도에 도착하기 직전인 9월 6일, 서둘러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1945. 9. 6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곧 도착할 미군에게 자신을 한국의 대표적 정치세력으로 내세우고자 한 것이었다.

 

1945년 9월 8일, 마침내 미군이 인천에 도착했다.
이튿날 서울에 진입한 미군은 일본군과 총독부의 항복을 받았다.
미군은 총독부의 행정기구와 인력을 물려받았고 미군정이 유일한 정부임을 선포했다.

 

1945. 9. 8
미군, 인천 도착

 

존 리드 하지 / 미군정청 사령관
1ㆍ2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한 전형적인 야전 지휘관

 

미군정 선포
해방 후 3년간 남한지역에 군정 실시

 

공산주의자들의 조선인민공화국 선포에 반발한 국내 우파 민족주의 인사들은 9월 16일, 송진우가 주축이 되어 한국민주당을 결성했다. 한민당 계열 인사들은 이후 미군정에 협조하는 여당 역할을 했다.

 

조선인민공화국 조각완료

한국민주당

김성수 / 김병로 / 송진우 / 원세훈 / 장덕수

 

해외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도 속속 고국으로 돌아왔다.
10월 중순에는 이승만이 미국에서 귀국했다.

 

1945. 10. 16.
이승만 귀국

 

미국 국무부는 그의 귀국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철저한 반소 반공주의자인 그가 한국에서 미소 양국의 협조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도쿄에 있던 또 다른 반공주의자, 맥아더의 도움을 받아 귀국할 수 있었다.

 

1945. 10. 20.
서울 시민 미군 환영 대회

 

더글러스 맥아더 / 태평양전쟁 미군 최고사령관

 

이어서 김구를 비롯해 중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역시 고국 땅을 밟았다.

 

1945. 11. 23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귀국

 

이로써 주요 정치 지도자들이 모두 무대에 등장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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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45년 12월 하순 초특급 강진이 남한 정계를 강타했다. 진원지는 모스크바였다.

 

1945년 12월 16일에서 26일. 소련의 모스크바. 미, 영, 소 3국의 외무장관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한국 문제도 그중 하나였다.

 

재연

 

1945. 12. 16~26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 회의

회의에서는 한국에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이를 통해 일정기간 신탁통치하는 것에 대해 협의하기로 결정했다.

일찍이 미국, 영국, 소련, 중국 4개국이 카이로회담과 테헤란회담에서 그렇게 하기로 합의한 바였지만, 이 소식은 국내 정계에 핵폭풍을 불러 일으켰다.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 회의 결정 사항>
1. 독립국가로 재건설하기 위해 임시정부 수립할 것
2. 그러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열 것
3. 최고 5년 기한으로 미, 영, 소, 중 4국의 신탁통치를 실시하되 그 방안은 미·소공위가 조선 임시정부와 협의할 것
4. 남북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2주 내로 미·소 양군 대표회의를 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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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언론은 발 빠르게 모스크바 회의의 결정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동아일보가 1945년 12월 27일자 1면 머리기사로 ‘외상회의에 논의된 조선 독립 문제’를 다루면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이라고 보도했다.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 1945. 12. 27 동아일보

 

신탁통치는 당초 미국이 제안한 것으로 동아일보의 보도는 잘못된 것이었다. 이 오보는 반탁운동과 반소 감정을 확산시키는 데 일조했다.

 

신탁

 

신탁통치 결정은 일반 한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박성수 명예교수 / 한국학중앙연구원 (1931년생)
당연히 독립되는 것으로 알았죠. 그런데 독립은 해 주는데 신탁통치는 받아라, 그때 신탁통치라는 것은 또 한 번 식민지가 된다는 그런 것으로 받아들였죠. 그래서 반대를 했고.

 

불과 몇 달 전, 독립만세를 외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에게 ‘신탁’이란 단어는 고통스러웠던 식민 지배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는 전 민족적인 반발을 불러왔다.

 

우리에게 독립 아니면 죽음을 달라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이튿날인 12월 28일 저녁. 김구가 이끄는 임정은 각계 대표자들을 모아 신탁통치를 막자는 대책 회의를 열었다.
이들은 다음날인 29일,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고 강력한 반탁 운동을 시작했다.

 

1945. 12. 29
탁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 결성

 

임정 세력은 30일, 반탁 시위를 촉구하는 포고를 발표하면서, 미군정에 소속된 한국인 직원과 경찰은 앞으로 미군정 대신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르라고까지 했다. 미군정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자신에 대한 쿠데타를 선동한 것이었다.

 

[국자(國字:임정포고) 제1호]
1.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구 급 한인 직원은 전부 본 임시정부 지휘 하에 귀속케 함
2. 탁치 반대의 시위운동은 계통적 질서적으로 할 것
3. 폭력행위와 파괴행위는 절대 금지함

대한민국 27년 12월 30일
내무부장 신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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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좌우익을 막론하고 반탁의 목소리는 높았다. 심지어 반탁운동에 신중한 입장을 보였던 한민당의 지도자 송진우가 암살당했을 정도였다.

 

독립전선에 귀중한 생혈
송진우 선생 순국

 

그런데 1월 3일. 반탁 시위인 줄 알고 서울운동장에 모였던 대중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신탁통치 찬성을 뜻하는 ‘모스크바협정 지지’ 시위였던 것!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들이 돌연 태도를 180도 바꾼 것이다.

 

1946. 1. 3
조선 자주 독립 민족 통일 전선 결성 시민대회

 

삼상결정 절대 지지

 

박성수 명예교수 / 한국학중앙연구원 (1931년생)
5년만 참으면 독립할 수 있다 뭐 이렇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해명을 했죠.

왜 공산주의자들은 돌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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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 회의 결과가 공표된 다음날인 1945년 12월 28일 밤.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은 38선을 넘어 북으로 향했다.

 

1945. 12. 28
박헌영 북행

 

회의 결정 지지에 대한 소련의 지침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모스크바 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오시프 스탈린 / 소련 수상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 / 국민대학교 국제학부
천주교에서 신부는 교황이 내리는 결정을 반대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당시의 공산주의 운동입니다. 스탈린은 교황보다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선택은 모스크바에서 나온 명령에 따르는 것, 그렇지 않으면 출당, 탈당입니다.

 

이미 38선 이북을 공산화하기 시작한 스탈린은 미소공위에서 통일 임시정부를 세울 때 공산당이 참여해서 핵심 요직을 차지하게 할 계획이었다. 이는 소련이 동유럽에서 밟은 공산화 전략과 같았다.

 

이지수 교수 / 명지대학교 북한학과
동유럽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면, 소위 연립정권을 구성해서 거기 참여를 합니다. 참여하는데 뭐 총리, 대통령 이런 거 다 맡지 않아요. 중요한 것, 내무장관, 그 다음에 국방장관, 이런 것만 딱 요구해요. 그러니까 무력을 장악하는 거죠. 그리고 나서 몇 개월 이내에 연립정권의 지도자 인물들이 암살당하거나 혹은 테러 당하거나 그러면서 결국 원래 구공산당, 지금 현재로선 노동당이라고 하는 이름의 세력들이 정권을 장악합니다.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좌익이 수세에 몰린 반면, 반탁 운동을 한 우익의 정치적 입장이 강화되었다.

 

이처럼 38선 이남에서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회의 결정에 대한 찬반으로 분열, 대립하고 있는 동안 평양에서는 소련의 계획대로 일사불란하게 공산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1월 초에는 신탁통치에 반대한 우파 민족주의자 조만식을 연금했다.

 

[북한의 사회주의화]
1946. 1. 우파 민족주의자 조만식 연금

 

2월 8일. 소련군과 북조선공산당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설립하고, 위원장에 김일성을 선임했다. 이는 북한에서 법령을 제정하고 집행하는 중앙행정 주권기관, 즉 사실상의 단독정부였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설립/ 1946. 2. 8

 

위원장에 김일성 선임

 

3월에는 지주들의 땅을 빼앗아 농민에게 나눠주는 토지개혁에 돌입했다. 토지개혁은 20일 만에 종료되었는데, 지주들은 토지를 빼앗기고 거주지로부터 추방됐다. 토지개혁의 실무를 맡은 농촌위원회 위원 9만 여명은 북조선공산당에 가입해 북한 사회주의체제의 확고한 기반이 됐다.

 

북한의 토지개혁 / 1946년 3월 시행
지주의 토지를 대가 없이 몰수, 농민에게 무상 분배 지주들은 거주지로부터 추방

 

소련은 토지개혁에 이어 사회개혁도 단행했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친일파, 반동분자, 반민주분자라 하여 숙청했고 북한 중요 산업시설의 90%를 국유화했다.

 

북한의 사회개혁
공산주의 반대인사들 숙청
중요 산업시설의 90%를 국유화

 

1946년 8월에는 북조선공산당이 중국 연안파의 조선독립동맹 계열이 만든 정당
- 조선신민당을 흡수 통합해서 북조선노동당을 창설했다.

이렇게 북한은 사회주의 정권 수립으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북조선 공산당-김일성 / 조선신민당-김두봉
1946. 8. 북조선노동당 창설

 

그러면서 소련은 미군정에 대해서는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통일 임시정부를 수립하자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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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946년 3월 20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회의는 위원회에 참여할 정당과 사회단체를 선정하는 데서 암초에 봉착했다.

 

1946. 3. 20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

 

소련은 모스크바 협정에 찬성하는 정당과 단체만, 즉 신탁통치에 동의하는 정당과 단체만을 미소공위에 참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스크바 협정에 찬성하는 정당과 단체만 미소공위에 참가시켜야 한다”

 

하지만 미국은 이에 반대했다. 미소공위가 소련공산당의 지령을 받는 좌파 정당 및 단체 일색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언론의 자유가 있는 만큼 주요 정당, 단체는 모스크바 협정에 대한 찬반 여부와 상관없이 위원회에 참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언론의 자유가 있는 만큼 주요 정당, 단체는 모스크바 협정에 대한 찬반 여부와 상관없이 위원회에 참가할 수 있다”

 

양자의 대립에는 절충할 여지가 없었다. 결국 5월 8일,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어 무기 휴회에 들어갔다.

 

1946. 5. 8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 무기 휴회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 / 국민대학교 국제학부
1946년 여름에 들어와 사실상 냉전 시대가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소련은 이와 같은 통일 국가가 필요 없다고 판단하는데 미소공동위원회는 그냥 분단화의 정당화 아니면 분단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위한 기구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미군정과 38선 이남의 각 정파는 각자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국을 끌어가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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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미국은 새 전략을 구상했다. 미소공위가 결렬된 지 약 한 달 후, 미국무부의 힐드링 차관보가 미군정 사령관 하지에게 지침을 보낸다.

 

미국의 새 계획 : 좌우합작

 

존 힐드링 / 미 국무 차관보

 

FRUS(미국외교기밀문서) 1946
“미국은 언론자유의 원칙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고수한 반면, 소련은 확고한 반소 입장을 가진 조선지도자들을 조선임시정부에서 배제하려고 결심했기 때문에 미소공위가 결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지도자들은 일본의 항복 이후 조선으로 귀국한 나이 많은 망명객 집단을 구성하고 있다.”

 

미국무부가 미소공위 결렬의 원인으로 지목한 나이 많은 망명객 집단은 누구일까?

 

이철순 교수 / 부산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임시정부하고 이승만 대통령을 지칭하는 게 아닌가. 미국의 국무부 관리들은 이승만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 알다시피 미국과 소련은 서로 협조하면서 전쟁을 하고 있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2차 대전 이전부터 미국무부를 찾아다니면서 소련을 경계하라고 여러 차례 경고를 했습니다. 해방 이후에 이승만이 귀국한 이후에도 소련과 협조하는 정책에 대해서는 반대를 했었기 때문에 미국의 특히 국무부 관리들은 이승만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고 김구 선생 같은 경우에는 임시정부가 미군정을 접수해서 정부 행세를 해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그 이후부터는 김구에 대해서 미국도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미 국무부는 이승만과 김구를 배제하고 미국의 정책에 협조할 새로운 세력을 양성하라고 미군정에 지시했다. 미군정은 이 지침에 따라 새로운 인물을 모색했다. 1946년 6월 30일 미군정청 하지 사령관이 성명을 발표한다.

 

존 리드 하지 / 미군정청 사령관

 

통일에 성심, 진정한 협력
김규식, 여운형 씨의 활동을 지지

“나는 김규식 박사와 여운형 씨가 남조선에 있는 중요한 정당 간에 배전의 협동과 통일을 위하여 진력하는 것과 그 노력의 진전이 있다는 보고를 매우 흥미 있게 보고 있다. 나는 미군사령관으로서 김,여 양씨의 노력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전적으로 시인하고 지지한다.“
- 1946. 6. 30 미군정 하지 중장 성명 중

 

미국의 새로운 전략은, 온건한 중도파, 즉 중도우파인 김규식과 중도좌파인 여운형을 내세운 좌우합작이었다.

이에 1946년 초여름부터, 미군정의 후원 아래 김규식과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이 추진되었다.

하지만 이 운동은 정국의 주도적 흐름이 되지 못했다.

 

김규식

 

여운형

 

이철순 교수 / 부산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좌우합작은 미군정, 미국무부의 이상적인 정책이었으나, 1946년에 있었던 입법의원 선거에서 좌우합작 세력은 거의 당선이 되지 않습니다. 주로 한민당 계열이나 이승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대거 당선이 됩니다. 이런 것을 봤을 때 현실에서 좌우합작 정책이라는 것이 벽에 부딪혔다, 현실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는 융합할 수 없는 정책이었다,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미국은 한국에서 좌우합작을 강압으로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결국, 1946년 5월 이후 미국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실천하려고 중도파의 좌우합작이라는 정책으로 시간을 낭비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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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한편, 미국이 중도세력을 지원하고 우익진영을 견제하자 이승만과 김구는 미군정에 대립적인 자세를 취했다.

미소공위가 무기휴회에 들어간 후 지방 순회 강연에 나선 이승만은 6월 3일 정읍에서 새로운 제안을 한다.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입니다.”
-1946년 6월 3일-

 

당시 이승만의 이 발언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제창하는 발언으로 간주되어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는 왜 이런 발언을 했던 것일까?

 

신복룡 전 석좌교수 /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첫째로 미소공위가 이미 희망 없는 허상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그는 똑똑하게 목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체질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반공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이미 북한은 미국보다 훨씬 더 탁월한 소련의 동화정책에 의해서 전국에 인민위원회 조직이 끝난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스스로 남한만이라도 자유 민주주의적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축복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미군정이 자신을 좌우합작운동에서 제외하자, 이승만은 직접 미 국무부를 상대하여 대한정책을 바꾸려 했다.

그는 1946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미국에 머물면서 미국 정부를 상대로 조속히 선거에 의해 정부를 구성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의 입장은 미소공위를 통해 한국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미국 정부 측 인사들은 이승만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조선 독립의 6개안-이 박사 미 국무성에 제안“
1) 총선거에 의하여 남북 통일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남조선의 과도 정부를 수립할 것
2) 이 과도 정부는 미-소 양국 간의 교섭을 방해하는 바 없이 점령군과 기타 중요 문제에 관하여 미-소 양국과 교섭할 것
3) 조선의 경제 재건을 위하여 일본에 대한 조선의 배상 요구를 속히 고려할 것
- 1947.2.12. 동아일보-

 

한편, 김구는 국내에서 반탁운동을 계속하면서 미군정과는 별개의 과도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다. 김구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우익 진영의 정당과 사회단체를 모아서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이 기구를 통해 새로운 임시정부를 조직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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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한편 미소공위 결렬 후, 공산주의자들 또한 전술을 바꾸어 미군정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946. 7.
조선공산당 ‘신전술’ 발표

 

결정적 계기는 1946년 5월 15일 발표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었다. 이것은 조선공산당이 당비를 마련할 목적으로 위조지폐를 만들어 썼다는 것이었다.

 

조선 정판사
일제 말기 지폐를 인쇄하던 곳으로 해방 후 조선공산당이 접수해 조선 정판사로 이름을 바꾸고 ‘해방일보’라는 기관지를 발행한 곳

 

‘지폐 위조 사건 진상 전모 공보부서 정식 발표’
위조 일당은 16명 / 전부가 공산당원
- 1946. 5. 16, 동아일보

 

이 사건으로 주요 간부들이 수배되고 기관지 해방일보가 폐간되어, 공산당은 활동에 큰 타격을 입었다.

 

수세에 몰린 조선공산당은 1946년 7월,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는 신전술을 발표했다. 미군정에 타격을 주는 전면적인 대중투쟁을 벌인다는 것이었다.

 

좌익은 9월 주요 도시에서의 총파업 투쟁에 이어 10월에는 대구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시위와 봉기를 일으켰다. 이 때문에 정치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곤란이 가중됐다.

 

[조선공산당의 신전술]
9월 주요 도시에서 총파업 / 10월 대규모 시위와 봉기

 

이처럼 1946년, 북한이 공산주의 방향으로 확고히 나아가는 데 반해, 남한은 미군정의 실효성 없는 정책과 여러 정치세력 간의 투쟁으로 심각한 진통을 겪고 있었다.

 

1946년의 한반도
북한 : 북조선공산당의 사회주의화
남한 : 미군정과 중도파의 좌우합작운동
이승만의 남한 과도정부 수립론
김구의 반탁운동
박헌영의 반미군정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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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947년 봄, 미국과 소련은 미소공위를 재개했다. 이번 회의는 평양에서 열렸다.

 

1947. 5. 21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

 

미국과 소련은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한다는 서약서를 내는 정당과 사회단체만 회의에 참가시키기로 합의했다.

 

[미국과 소련의 합의사항]
“모스크바 협정 지지 서약서를 내는 정당과 사회단체만 회의에 참가 시킨다“

 

그러나 소련은 반탁운동을 계속하는 정당 사회단체는 서약서를 내더라도 참가시킬 수 없다고 주장해 미국과 대립했다.

 

[소련의 주장]
“반탁운동을 하는 단체는 협정 지지 서약서를 내더라도 회의에 참가할 수 없다”

 

결국 제2차 미소공위도 결렬되었다.

 

한반도 문제를 빨리 매듭짓고 싶었던 미국은 이미 유효성이 다한 모스크바협정-미소공위의 틀을 벗어나고 싶었다.

 

제2차 미소공위가 진행 중이던 8월, 미국은 소련에 영국과 중국을 포함한 4자회담에서 한국 문제를 협의하자고 제안했다.

소련이 그를 거부하자, 미국은 유엔에서 한국문제의 해결안을 마련하고자 했다.

 

미국
“미・영・소・중 4자 회담에서 한국 문제를 협의하자“

 

소련
거부

 

미국은 9월,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할 수밖에 없다고 소련에 통고한 후 유엔 총회에 한국문제의 의제 채택을 요구했다.

 

미국
“한국 문제를 UN에 이관할 수밖에 없다”

 

이철순 교수 / 부산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미국은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되기 이전부터 한국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서 미국의 군부와 국무부가 큰 대립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군부는 한국의 군사전략적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지상군을 철수하자는 입장을 개진하는데 그에 대해서 국무부는 아직도 미국의 체면이 한반도에 많이 걸려 있기 때문에 섣불리 철수해서는 안된다라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의 대립이 1947년 9월 경에는 서로 합의를 하게 되고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을 철수하고 한국 문제를 UN으로 넘긴다, 즉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쪽으로 서로 의견을 수렴하게 됩니다. UN으로 넘긴 이유는 역시 UN에서 미국의 힘이 크게 작용을 하고 미국을 지지하는 국가가 많기 때문에 한국 문제를 해결하기 좋았다 이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

 

1947년 9월 23일, 유엔총회가 한국문제를 의제로 채택함으로써 한국 문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1947. 9. 23
UN 총회, 한국문제를 의제로 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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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4일.
유엔은 총회를 열고 유엔 감시 아래 남북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정했다.

 

1947. 11. 14
UN 총회, ‘UN 감시 아래 남북 총선거 실시’ 결정

 

약 두 달 뒤인 1948년 1월 8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와서, 유엔 결의안에 따른 남북 총선거의 실시 방안을 마련하고자 했다.

 

1948. 1. 8
UN 한국임시위원단 도착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남한에서의 조사 활동에 이어서 북한에서도 조사 활동을 하고자 했으나 소련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유엔은 2월 26일 소총회를 열고 유엔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 곧 남한에서의 선거를 결정했다.

 

1948. 2. 26
UN 소총회, ‘UN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 결정

 

3월에 제정된 선거법에서는 남북한 인구비례에 따라 국회의원 정수를 남한 200명, 북한 100명으로 정했다. 5.10 제헌선거는 통일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회의원 정수
남한 200명
북한 100명
미군정, 국회의원 선거법 공포 (1948.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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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하기로 한 때부터 소련과 남북한의 공산주의세력은 이를 막으려는 공작을 펼쳤다.

그들은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을 반대하고, 대신 미소 양군의 조기 철수 및 조선인들에 의한 조선 문제 처리를 주장했다. 이것은 얼핏 보면 그럴듯해 보이나, 결국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노린 제안이었다.

 

소련과 남북한 좌익의 제안
-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 반대
- 미・소 양군의 조기 철수
- 조선인에 의한 조선 문제 처리

 

양동안 명예교수 / 한국학중앙연구원
북한은 완전히 공산화 토대가 굳혀져 있고 남한의 좌익 세력이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고 남한의 우익 세력은 분열되어 있고 또 중도파는 중도파대로 독자 노선을 가고 있고 이런 조건에서 남북한의 정치 세력이 회의를 하게 되면 북한의 공산당, 남한의 좌익이 주도하는 그런 회의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목적을 달성하려고 소련은 한반도에 주둔하는 미군과 소련군의 조기 철수를 제안했던 것입니다.

 

남로당은 폭력 투쟁도 불사했다. 1948년 2월 7일, 남로당계의 노동자, 농민, 학생들이 단독 선거 단독 정부 반대를 내걸고 파업과 시위를 벌여 전국 곳곳에서 경찰과 유혈 충돌했다.

 

1948. 2. 7
2.7 총파업

 

특히 선거일이 5월 10일로 결정된 이후, 4월 3일, 제주도에서는, 남로당 세력이 선거를 막기 위해 무장 봉기를 일으켰는데 이로 인해 선거가 제대로 치러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군대와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양민들까지 희생되는 비극이 벌어졌다.

 

1948. 4. 3
제주 4.3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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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감시하의 선거를 둘러싸고 남한 우익과 남북한의 좌익이 격렬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우파의 김구를 포함한 남한의 중도파들이 선거 반대로 돌아섰다. 그대로 선거가 치러질 경우 분단이 굳어지리라는 이유에서였다.

 

중도파 중 김규식 등은 한때 유엔의 남북한 총선거안을 지지했으나, 1948년 초부터 입장을 바꾸어 미소군 조기철수와 남북협상을 주장했다.

 

김규식

 

이승만처럼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를 지지한 우파 지도자 김구도 1월 말부터는 미소군 철수 및 남북지도자회의에 동조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2월 초에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과 남북지도자회담을 열자는 제안을 했다.

 

북한 정권은 한 달도 더 지난 3월 25일 회담 제안을 한다. 4월 14일 평양에서 38선 이남에서의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전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열자는 것이었다.

 

이것이 협상 의향이 있는 선의의 제안이었다면, 북한 정권은 협상 파트너인 남한의 김구, 김규식과 회담 개최일자라든지 의제를 정했어야 하지만, 이들과 아무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개최일자, 의제를 정해서 발표해 버렸다.

 

신복룡 전 석좌교수 /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북한은 왜 남쪽 지도자를 불렀을까. 북한은 북한이 먼저 분단 정권을 수립했다고 하는 역사적 비난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 수순으로 남한의 정치 지도자들을 불렀습니다.

 

평양방송이 먼저 일방적으로 제안한 후, 김구, 김규식 등 남한의 지도자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김구와 김규식은, 평양 정권에 이용만 당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했으나, 조국의 분단을 막을 마지막 기회라는 애국충정에서 북으로 향했다.

 

1948. 4. 19 김구 북행

 

평양에서의 연석회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남한의 단독선거를 비난하는 결의로 이어졌다. ‘협상’이라 할 만한 게 없었다.

 

1948. 4. 19
전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양동안 명예교수 / 한국학중앙연구원
연석회의도 남북협상 회의도 북한 정권이 일방적으로 써놓은 시나리오대로 그대로 했습니다. 그리고 남한의 대표들은 거기에 지지하는 발언, 그리고 막판에 가서 그 문건들에 대해서 참여한 대표들이 동의했다는 서명만 하는, 그런 일을 했습니다.

 

배후에는 소련이 있었다. 회의가 열리기 일주일 전, 소련 공산당 정치국이 평양의 점령군 사령부로 보낸 문건이 이를 뒷받침한다.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결정 의사록 제63호 제38항
- 1948년 4월 12일

<김일성 동지를 위한 조언>
연석회의를 진행할 때 다음과 같은 정치적 기초에 의거한다
- 조선의 통일과 독립을 지연시킬 목적에서 실시되는 남조선 단독 선거를 보이코트하게 한다.
- 남조선에서 외국 군대를 철수시키자는 소련의 제안을 지지하고, 남조선에서뿐만 아니라 북조선에서도 신속하게 외국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요구한다.
스탈린

 

조선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 (1948년 4월 26일)
“우리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들은... 남조선 단독선거를 파탄시켜야 할 것이며, 조국에서 외국군대를 즉시 철거하고 조선인민이 자기 손으로 통일적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할 권리를 부여하자는 소련의 제안을 반드시 실현시키기 위하여 강력히 투쟁할 것...”

 

문서의 내용은 2주 후, 연석회의에서 채택한 결정서 내용과 거의 일치했다.

 

5월 5일 김구 일행이 서울로 돌아왔다. 조국의 분단을 막고자 한 충정은 소련과 북한의 계략으로 인해 아무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선거 불과 닷새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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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948. 5. 10
5.10 총선거

 

1948년 5월 10일은 조선 역사상 가장 중요한 날입니다. 투표 등록자들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진정한 민주주의 선거에 투표를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조선 전체를 통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투표할 권리가 있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위협을 무릅쓰고 대담스럽게도 투표장으로 가서 각각 자유 의사에 의하여 입후보자들 가운데서도 어느 한 사람을 선택하는 귀중한 한 표를 던진 것입니다.

 

5월 10일.
태극기가 집집마다 게양됐고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투표장 앞에 줄을 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하기도 했고 혹여 실수라도 할까 조심스럽게 투표에 임했다.

 

강원택 교수 /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유엔 감시단에서 일부 문제 제기를 하긴 했습니다만 큰 틀에서는 심각한 문제없이 전반적으로 공정하게 선거가 치러진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요. 놀라운 것은 그 당시의 투표율이 95.5%였다는 것입니다. 지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투표율인데 새로운 우리의 독립 국가를 만든다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국민들이 정말 큰 관심과 애정을 갖고 참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서 파견한 30명 감시원의 감시 아래 치러진 총선. 투표율 95.5%를 기록한 투표를 통해 904명의 입후보자 가운데 198명이 국회의원으로 선출됐다.

 

5.10 총선 결과
투표율 95.5%
국회의원 198명 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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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1일 제헌국회가 개원했다. 헌법을 제정했다 하여 이름 붙여진 대한민국 최초의 국회였다. 의장에는 이승만이 선출됐다.

 

1948. 5. 31
제헌국회 개원

 

이승만 의장 개회사
“이 국회는 전 민족을 대표하는 국회이며, 이 국회에서 탄생하는 정부는 완전한 한국 전체를 대표할 중앙정부임을 공고하는 바입니다.”

 

이어 7월 17일에는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됐다. 과연 어떤 나라를 꿈꾸었던 것일까? 그 이상은 제헌헌법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유진오의 제헌헌법 초안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 대한민국 관보 제1호 제헌헌법 조문 중-

 

강경근 교수 / 숭실대학교 법학과
그 제헌 헌법 속에 이 새로운 나라는 세계사의 흐름인 자유와 민주와 시장경제의 방향으로 가야겠다 그것을 확실히 해줬고 국민에게 주권이 있다고 하는 국민 주권 국가를 선언하고 그러한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권력을 제한하고 이 한반도에는 유일한 주권국가는 대한민국만이다라고 함으로써 국가적 정통성도 명확히 한 점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7월 20일에는 국회의원에 의한 간접선거로 초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초대 대통령은 총180표를 얻은 이승만이 선출됐다.

 

1948. 7. 20
초대 대통령 선거 실시

 

초대 대통령 이승만 당선

 

대통령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나에게 투표해 주신 것을 나로서는 감격하여 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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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948년 8월 15일.
해방이 된 날로부터 꼭 3년이 되던 이 날.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국민 앞에 섰다. 수많은 국민들과 함께 정부 수립 선포식이 거행됐다.

 

1948. 8. 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이승만 대통령 경축사]
“8월 15일 오늘에 거행하는 이 식은 우리의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우리 민국이 새로 탄생한 것을 겸하여 경축하는 것입니다. 이 날 동양의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돼 40여 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영웅적으로 투쟁해 온 결과가 이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침내 독립 정부가 수립됐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강점된 지 38년 만이었고, 만 3년에 걸친 미군정 시대도 막을 내렸다. 민족이 그토록 염원하던 독립 국가가 마침내 대한민국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한편, 1948년 12월 12일 열린 유엔 총회는 유엔의 한국문제 결의가 제대로 이행되었음을 확인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승인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1948. 12. 12
UN 총회, ‘대한민국 정부 승인’ 결의 채택

 

[유엔총회 결의문]
“임시위원단의 감시와 협의가 가능했고 전체 한국의 절대 다수 국민들이 거주하는 한국의 그 지역에 대한 유효한 지배권과 관할권을 가진 합법적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이 정부는 한국 내의 유일한 그러한 정부임을 선언함.”

 

김명섭 교수 /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부터 추진되어 왔던 대한민국의 건국의 국제적 완성의 의미가 있다. 아울러서 1948년 12월 12일 대한민국이 국제적 승인을 받았기 때문에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하고 대한민국이 소멸될 뻔했던 그런 위기 상황 속에서 바로 국제사회가 개입을 해서 UN군을 파견해서 대한민국이 보존될 수 있었던 기반이 마련됐다.

 

강원택 교수 /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그것이 유일한 정부다 아니다 라는 것보다 대한민국이 그렇게 합법적으로 자유로운 정상적인 절차에서 만들어졌다, 그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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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약 20일 뒤인 9월 9일.
북한에도 정식으로 국가가 수립됐다. 북한에서는 이미 4월에 국호를 제정하고 헌법 초안을 통과시켰다.

8월에는, 38선 이남의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지하 선거를 통해 총선을 실시했다.

9월 2일, 조선최고인민회의에서 헌법을 채택하고 내각과 최고재판소 등 정부를 구성했으며, 김일성을 수상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1948. 9. 9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 / 국민대학교 국제학부
북한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 8월 15일 대한민국 선언까지 기다렸습니다. 이유는 무엇일까? 책임 문제입니다. 책임을 회피하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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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 대한민국은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나라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한민족 역사상 최초로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나라였으며, 국민 각자가 자유롭게 자신의 재능을 펼치고, 땀 흘려 일한 대가를 보상받을 수 있는 체제를 지향했다.

 

신복룡 전 석좌교수 /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해방 3년이 사실은 준식민지도 아니고 식민지도 아니고 해방도 아니고 독립도 아닌 매우 어정쩡한 국가 상태를 유지했었습니다. 그러다가 1948년에 국가가 수립되었던 것은 일제 35년의 청산, 국민 국가의 탄생,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도입, 이런 것들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절반의 축복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박성수 명예교수 /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한민국 정부수립으로 인해서 남북통일이 거덜 나고 에.. 통일이 안 되고 남북 분단이 됐다, 이거, 이런 논리는 사실에 맞질 않아요. 왜 그러냐 하면 이북에서는 이미 인민위원회를 만들어서 사실 상의 국가를 만들었어요. 건국하고 있는 거야, 감춰놨어요. 만약에 그때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안 됐다면 영원히 우리 독립은 잃어버리고 마는 거야. 아니면 공산주의 국가가 되는 거야.

 

이철순 교수 / 부산대학교 정치외교학과
1948년 정도면 이 동아시아에서는 완전히 러시아는 이제 공산주의 국가이고 북한도 이제 완전히 김일성 체제에 들어갔는데 나머지 반쪽을 지켜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든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강원택 교수 /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출발은 굉장히 미미하고 또 불안정하고 또 그동안 여러 가지 어려움도 많았고 실수도 많았다고 생각을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런 부분을 다 털어내고 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보면 북한까지 끌어안을 수 있는 보다 큰 공동체를 향해서 나아가는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지 않느냐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여러 가지 미비점과 결함을 안고 출발했지만, 그 결함을 개선하고 부족한 것을 채워나갈 수 있는, 역사 발전의 방향을 올바로 설정했던 나라. 바로, 우리의 대한민국이다.

 

역사 발전의 방향을 올바로 설정했던 나라

 

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