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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방위산업 육성 : 자주국방의 토대 구축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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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방위산업 육성 : 자주국방의 토대 구축


1.


1945년 8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낳은 전쟁은 미국과 소련이 주도한 연합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는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냉전체제가 형성되었다.

해방을 맞은 한반도에도 냉전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종전 직전 북위 38도선을 임시 점령선으로 정하고 각각 남한과 북한에 진주한 미국과 소련.

미소 양국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4개국 신탁통치를 결정했고 이는 결국 분단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한반도에 들어선 서로 다른 체제의 두 국가.

1949년, 중국의 공산화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커지자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 아래 한반도를 적화 통일하고자 6.25전쟁을 일으켰다.

미국은 세계 60개국이 참여한 유엔군을 결성해 지원에 나섰고 중국과 소련 역시 전쟁에 개입해 유엔군에 맞섰다.

6.25 전쟁은 단순한 남북한 간의 전쟁이 아니었다.

국제적 냉전이 한반도에서 열전으로 전화한 것이었다.

 

정전협정으로 마무리된 3년간의 전쟁.

결국 한국과 북한은 냉전 체제의 최전선에서 군사적으로 상시 대치하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과연, 대한민국은 국가 안보를 지키고자 어떻게 대응했을까?


2.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남은 것은 초토화된 국토와 피폐해진 사람들.

남과 북 모두 전쟁의 상처를 추스르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러나 국제적 냉전 체제와 전쟁의 파괴적 영향을 두고 한국과 북한의 대응은 판이했다.

 

북한은, 중공업 우선 복구와 건설 위주로 전후재건을 진행했다.

그러나 이것의 실제 목표는 대남 적화 야욕을 실현할 수 있는 군사력의 강화.

1962년, 전 인민의 무장화, 전 국토의 요새화, 전군의 간부화, 장비의 현대화 등 4대 군사 노선을 채택한 북한은 60년대 후반에 이르러 대남 무력 도발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의 고전은 북한의 야욕을 더욱 부추겼다.

 


박종철 /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Q. 북한의 대남무력도발 증가와 베트남전

북한이 봤을 때 미국이 베트남전에 깊게 빠져들게 됨으로써 만약에 한반도에서 또 다른 전쟁이 발생하게 되면 미국이 베트남과 한반도에서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60년대 말에 북한이 대남 무력 도발의 기치를 올렸습니다.

 

 

1968년 1월 21일.

서울의 평화로웠던 일요일 아침은 공포로 물들었다.

북한 특수부대 소속 무장 게릴라 31명이 서울에 침투한 것이다.

자하문 한복판에 총탄이 쏟아지고 수류탄이 폭발했다.

바로 이틀 뒤인 1월 23일에는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납치되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120명의 북한 무장공비가 유격대 활동거점 구축을 목적으로 울진·삼척 지역에 침투, 2달여간의 소탕전이 펼쳐졌다.

1950년대 468회였던 북한의 도발 건수는 1960년대 1,338회까지 증가했다.

한반도에는 또다시 전쟁의 공포가 엄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전후 한국의 상황은 어땠을까?

사실, 전쟁 당시 한국 정부는 휴전을 반대했다.

끝까지 싸워 분단의 문제를 종결짓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쟁의 장기화를 부담스러워 한 미국은 휴전 회담을 이어갔고 한국 정부는 조건을 내걸고 정전 협정을 받아들였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 북한군의 재침략에 대비한 최소한의 안전 보장이 그것이었다.

정전 협정 체결 후 불과 두 달여 만에 한미 양국은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며 방위에 협력할 것을 합의했다.

6.25전쟁 초기 유엔군사령관에 이양했던 한국군의 작전지휘권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런 배경 아래 남한은 전후 경제 재건과 개발에 온 힘을 쏟아 부었다.

이승만 정부는 외국 원조를 지원받아 파괴된 산업 시설을 복구하고 생활필수품의 공급을 확대하고자 소비재산업 육성 정책을 추진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혁명공약에서 ‘북한과 경제로 체제 경쟁을 펼치겠다’고 천명했다.

이에 1962년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시작으로 매 5년마다 경제계획을 수립하고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1960년대 우리 경제는 매년 10%에 육박하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물론 이런 성과는 미국의 군사원조와 안보 지원 속에서 가능했다.

그런데, 1969년, 대한민국의 질주에 제동을 거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이 급변한 것이다.

미국은 아시아 자국의 방위는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내용의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박종철 /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Q. 닉슨독트린 배경, 닉슨독트린 발표 이후 미국의 세계 전략 등 1960년대 후반 국제안보 환경의 변화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미국의 가장 큰 문제는 베트남전을 종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베트남전으로 인해서 미국의 국론이 분열되고 미국의 재정적 부담이 굉장히 높아졌거든요. 그래서 닉슨이 베트남전에서 철수하겠다는 것을 공약으로 내세웠죠.

 

 

1972년, 미국 닉슨 대통령의 역사적인 중국 방문으로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개선됐고

그해 5월, 소련 역시 전략무기 감축 협정에 서명했다.

국제사회, 특히 동북아시아에서 냉전의 시대는 화해의 시대로 이행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의 상황은 달랐다.

첨예한 체제 대결을 벌이고 있던 남과 북, 북한의 대남 도발로 긴장은 더욱 높아지고 안보는 위기에 처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닉슨독트린에 따라, 1970년 7월 주한 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의 철수를 공식 통보해왔다.

미군의 일방적인 철수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민국 안보의 상당 부분은 주한 미군의 주둔으로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군의 군사력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1946년 미 군정청 산하의 ‘남조선 경비대’로 창설된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육해공 3군 체제를 갖춘 국군.

6.25 전쟁을 거치며 병력 자체는 크게 팽창했으나 식량을 제외한 장비와 물자, 무기 등 군수장비의 대부분은 미국의 군사 원조를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1970년대 초까지 지속됐다.

그렇다고 해서 자주국방 태세를 확립하고자 한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북한과의 비정규전과 북한군의 후방 침투에 대비하고자 1961년 12월 27일에 정부는 향토예비군 설치법을 공포했고 1963년에는 국군조직법의 개편과 함께 합동참모본부를 설치했다.

베트남전 참전을 계기로 미국 지원 아래 한국군 장비 현대화를 추진했으나 우리 국군의 무기와 장비를 우리 손으로 제조하지 못하는 여건은 변하지 않았다.

북한의 대남 도발 증가. 국제안보 환경의 변화와 주한 미군 철수.

국가 안보의 대위기를 맞아, 정부는 ‘자주국방’의 필요성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경제에 더해 안보까지 고려해야 하는 시기에 직면한 것이다.


3.


1968년, 정부는 북한의 도발에 대비해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자주국방의 건설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향토예비군에게 공급할 무기는 턱없이 부족했고 미국의 원조 없이는 한국군 장비 현대화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자주국방은 요원한 것이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자주국방이란 작전지휘권의 환수 등을 포함하는 다의적 내용을 담고 있지만 1960년대 후반에는 국군이 갖추어야 할 무기류 중에서 우리가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우리가 생산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따라서 자주국방은 무기 공장 건설, 즉 방위산업 육성과 같은 의미였다.

 

정부의 자주국방 목표는 일차적으로 향토예비군에게 기본 화기를 공급하고 이후 정규군이 무장할 수 있는 무기와 탄약을 생산하여 공급하는 것이었다.

1970년 7월에 수립한 ‘4대 핵공장 건설 계획’은 방위산업을 육성하고자 한 정부의 첫 시도였다.

외국에서 자본과 기술을 도입해, 방위산업의 근간이 될 주물선, 특수강, 중기계, 조선소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정부는 무기제조 기술을 개발하고자 1970년 8월, 국방과학연구소를 설립했다.

연구소의 임무는 ‘군의 임무 수행에 직접 필요한 병기, 장비, 기타 물자의 조사, 연구와 시험 등에 속하는 사항을 수행‘하는 것.

하지만, 무기를 생산할 기술도, 인력도, 자본도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외국 자본과 기술의 도입마저 실패하면서 4대 핵공장 건설 계획은 사실상 폐기됐고 국방과학연구소의 활동 역시 미미했다.

 


구상회 / 전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


Q. 번개사업 이전 국방과학연구소 활동, 미미했던 이유


건물도 없고 연구 시설도 그 당시엔 없고, 그냥 아무 것도 없었죠. 그리고 무기 개발에 대한 전문가도 우리나라에 있지도 않았고.

 

 

하지만, 정부의 자주국방 의지는 확고했다.

방위산업의 기반을 마련할 또 다른 방안이 필요했다.

대안은 오원철 상공부 차관보에게서 나왔다.

1971년 11월 10일, 그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막대한 자금이 드는 전문 방위산업체를 새로 지을 것이 아니라 기존 민간 공장을 활용해 부품을 만들고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시제품을 생산하자는 제안은 즉시 채택됐다.

청와대 비서실 내에 방위산업을 전담하는 경제 제2 수석 비서관실이 생겼고 11월 11일, 오원철 상공부 차관보를 수석비서관으로 임명했다.

같은 날, 국방과학연구소에 긴급 지시가 내려왔다.

칼빈 소총, M1 소총 등 당장 국산 병기 개발에 착수해 올해 내에 1차 시제품을 만들어 오라는 대통령의 지시.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아 먹어야 할’ 정도로 촉박한 사업, ‘기본 병기 긴급 시제’, 일명 ‘번개 사업’의 시작이었다.

신응균, 윤응렬을 중심으로 한필순, 김성진 등 당시 국내 과학계의 핵심 소장 연구자로 꼽히던 10여 명이 부문별 책임자로 차출됐다.

1차 시제 기한 12월 말, 예산 970만 원.

그러나 병기 개발 지식은 전혀 없었고 미국은 기술 지원마저도 거부했다.

 


서정욱 / 전 국방과학연구소 소장 (통신 장비 개발 담당)


Q. 번개사업, 개발자들은 어떤 생각, 어떤 각오로 임했는지

 

왜 이렇게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국가가 우리에게 시켰는가.

처음에는 절망 상태에 가까운, 해도 될 게 아니지 않느냐 하는 일부 소위 선배라는 분들의 얘기도 있고 했으나, 우리는 그것을 ‘아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목표를 가지고 노력을 하면 무언가 이루어질 것이다. 착수하는 것마다 다 성공하지는 못하더라도 한 번 시작해 보자.’

 

 

개발의 시작은 미군의 낡은 병기를 분해해 각 부품의 치수를 재고 모양을 베껴 조립 설계도를 그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그린 역설계도를 놓고 연구원들은 24시간 근무 체제로 개발에 매달렸다.

결과, 계획보다 앞선 12월 16일에 시제품을 완성했다.

그러나 재료도, 이를 가공할 기계도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급하게 만든 시제품에는 한계가 있었다.

 


구상회 / 전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 (번개사업 담당)


실제 실탄 사격을 들어갔는데. 뭐 결론적으로는 로켓포라든가 박격포라든가 탄약들은, 대인대전차들은 다 이상이 없었어요. 그런데 소총하고 자동소총하고 경기관총은 당장에 총열이 깨져 나가죠.

이건 군사 규격 재료도 아니고 가공도도 정밀도도 형편없이 말이죠, 외형만 만들었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여건 속에서도 연구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동시에 개발 품목을 추가하며 제2차, 제3차 번개 사업을 추진했다.

3차에 걸쳐 진행된 번개사업은 기본 병기에서 시작해 통신 장비, 개인 장구류로 품목이 확대됐고, 주요 무기와 장비류 등의 시제품을 모두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더해 미군보다 체구가 작은 한국군에 맞춘 한국형 병기 개발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미션 임파서블, 불가능해 보였던 번개사업은 정부의 강한 의지, 연구원들의 집념과 불철주야의 노력 아래 국산 무기 개발과 생산의 길을 열었다.

 

한편, 제1차 번개사업의 시제품 생산으로 국산 무기 개발의 가능성을 확인한 정부는 무기 개발의 목표를 상향 조정했다.

제3차 번개사업이 막 시작됐던 1972년 4월, 국방과학연구소에 극비 지시가 떨어졌다.

“1975년까지 200km 사거리의 국산 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하라.”

이른바, ‘백곰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당시 첨단과학의 집약체로 불렸던 유도탄은 전쟁을 육탄전에서 과학기술전으로 바꿔놓은 무기이기도 하다.

세계에서도 미국, 러시아, 독일 등 단 6개 국가만이 탄도 미사일 개발에 성공한 상황, 물론 우리나라엔 유도탄 전문가도 연구, 생산 시설도 없었다.

미국은 기술 지원은커녕 자신의 영향력 축소, 북한과의 전쟁 우려를 이유로 개발 자체를 거세게 반대했다.

국내에서도 미국과 갈등을 빚는 상황에 불만을 제기하며 반대하는 의견이 이어졌다.

정부는 유도탄 개발을 비밀리에 진행했다.

연구원들은 안가에 모여 24시간 연구에 매진했다.

미사일이 무엇인지, 필요한 기술과 시설은 무엇인지, 인력과 자금은 얼마나 드는지 등 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제반 요소를 파악하고 계획하는 데에만 2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천운으로 미 육군 미사일연구소를 견학할 기회가 주어졌고 1974년 5월 14일, 마침내 ‘항공공업육성계획’이라는 제목의 미사일 개발 계획안이 최종 재가를 받았다.

대전과 안흥에 유도탄 개발 연구소와 시험장이 들어섰고 젊은 과학자들은 치열하게 얻어낸 미국의 선진 기술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자 밤낮없이 연구 개발에 매진했다.

지시가 내려온 지 6년, 개발에 착수한 지 4년만인 1978년 4월.

백곰의 첫 비행 시험이 이루어졌다.

모두 숨 죽인 채 탄도를 보여주는 대형 화면만 주시하고 있는 상황.

 


박준복 / 전 국방과학연구소 단장 (백곰 사업 담당)


예상 탄도를 백곰 미사일이 아주 잘 따라가 줬어요. 그래서 숨죽이고 있었는데 2/3 지점까지 잘 비행하던 유도탄 신호가 화면에서 갑자기 없어졌어요. / 백곰 미사일이 화면에서 갑자기 사라진 거예요. 더 이상 신호 추적도 할 수 없고 신호도 오지 않는 거죠.

 

 

2차 비행시험 역시 실패!

6월 3일, 3차 시험에서 드디어 유도탄이 표적에 명중했다.

거듭된 실패 끝에 거둔 값진 성공.

그로부터 3개월 후인 1978년 9월 26일.

마침내 국산 유도미사일 백곰이 국민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미사일 시대를 열게 되었다.

 


구상회 / 전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 (백곰 사업 담당)

 

Q. ‘백곰’ 개발 성공의 의의

오늘날 현대 무기 체계 중에서 핵심이 뭐냐면, 잘 아시다시피 유도탄입니다. 유도탄을 저희가 성공리에 개발하고 연구 시설뿐만 아니고 생산 기관 시설까지도 완공한 것.

정밀 무기 체계도 저희가 개발 생산할 수 있는 방위산업의 토대가 이루어졌다는 것이고요. 그럼으로써 그와 같은 기술 축적을 통해서, 기술 축적을 통해서 저희가 앞으로 어떤.. 군에서 요구하는 그런 군사력도 건설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자주국방을 마련하는 기틀이 되었다

 

 

1970년대 국방과학연구소가 축적한 고도 정밀 기술은 민간업체와 민간연구소로 이전되어 대한민국 산업기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4.


국산 무기를 개발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무기 제조 기술을 학습해 그것을 시제품으로 구현하는 것과, 방위산업을 육성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방위산업을 육성하려면 대량의 무기를 생산할 공장, 이를 꾸려갈 재원과 인력, 생산한 무기의 안정적 수요가 갖춰져야 했다.

경제와 안보를 동시에 추진해야 했던 당시로선 제한된 재원과 인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했고 이에 정부는 제1차 번개 사업에서 적용했던 민간 기업의 활용을 적극적으로 검토했다.

1972년 2월 21일, 정부는 제1차 방위산업육성회의에서 병기생산 기본방침을 발표했다.

병기생산은 평시산업과 병행 육성하며 민간 전문 생산업체를 방위산업 업체로 지정해 부품 제작은 방위산업 업체가, 조립은 군공창이 담당한다는 내용이었다.

번개 사업의 연이은 성공으로 민간 공장의 활용 방침은 확실하게 결정되었고 정부는 이제 무기개발의 외연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1972년 4월, 제2차 번개 사업 시사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직후, 정부에서는 향토예비군 무장에 필요한 무기 개발을 넘어 현역군 무장에 필요한 무기까지 개발할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이는 현존 민간 공장을 방위산업 업체로 지정하는 수준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충분하고 안정적인 병기 생산 체제를 갖추어야 가능한 일.

방위산업을 육성하려면 먼저 그 기반이 되는 중화학공업의 육성이 필요했다.

 

중화학공업의 육성에는 경제적인 이유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경제 제일주의를 채택했던 정부는 1960년대와 마찬가지로, 70년대에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해 높은 경제 성장률을 목표로 제시하고 국민의 생활수준을 더욱 향상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이후 근로자 임금은 가파르게 상승했고 미중 화해분위기 속에서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이 세계시장에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속적인 성장을 유지하려면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1980년대 초 수출 10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의 목표를 달성할 돌파구.

바로 중화학공업의 육성이었다.

사실,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려는 계획은 72년 초부터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이 공식화된 것은 1973년, 정부는 중화학 공업화를 선언했다.

1973년 5월 중화학공업 추진위원회를 설치하고 철강, 조선, 비철금속, 기계, 전자, 화학공업 등 6개 업종을 중심으로 한 ‘중화학공업 육성 계획’을 발표했다.

이런 점에서 중화학공업 육성은 경제 성장과 방위산업 육성을 동시에 달성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한민국만의 독특한 방위산업 구조가 탄생했다.

 

방위산업 건설로 자주국방의 첫걸음을 뗀 대한민국.

그러나 무기 생산에 앞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어떤 무기를 얼마만큼 생산할 것인가를 정확히 계산하는 것.

현재의 군사력 실태는 어떤지, 앞으로 어떤 식으로 재편할 것인지를 먼저 파악해야 했다.

즉, 우리 군의 군사전략 수립이 필요했다.

1973년 4월 19일.

대통령 앞에 보고서 하나가 올라왔다.

이병형 합동참모본부장이 작성한 ‘지휘 체계와 군사전략’.

아직 독자적인 군사전략을 수립하지 않았던 당시.

보고서는 우리의 현 군사력 실태를 파악하고 향후 우리 군사력을 단계적으로 어떻게 재편할 것인가를 담고 있었다.

이는 우리의 자주국방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는 것이었다.

 

 

임동원 / 전 통일부 장관

 

Q. ‘지휘체계와 군사전략’ 작성 배경

 

(이병형 장군은) 정확한 투시력을 가지고 비전을 갖고 올바른 판단력이 있고 결단력이 있는, 당시로는 한국군의 유일무이한 군사 전략가였어요. 다른 사람들은 작전은 잘 한다 하지만 전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던 시절인데, ‘이대로 가면 군대, 안 되겠다.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서 우리 군대를 군대다운 군대로 만들어야겠다. 자주국방 체제를 확립해야겠다.’ 해서 대통령께 보고를 하게 되는 겁니다.

 

 

정부는 즉시 ‘독자적인 군사전략과 전력증강 계획을 수립’할 것을 지시했다.

합동참모본부를 중심으로 기본 군사전략을 수립하고 1973년 7월에 ‘군 장비 현대화 계획 작성 지침’을 각 군에 하달했다.

각 군에서 작성한 계획을 다시 합동참모본부에서 종합, ‘군사력 건설 국방 8개년 계획’을 완성했다.

이 계획은 74년 1월, 합동참모회의 의결을 거쳐 2월 25일,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최종 승인되었다.

이른바 ‘율곡계획’으로 불린 군사력 건설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순간이었다.

율곡은 ‘십만양병론’을 주장한 율곡 이이 선생의 유비무환 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였다.

율곡 계획은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는 무기와 장비, 외국에서 조달해야 하는 무기와 장비를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이 중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중화학공업과 연계한 방위산업에서 생산하여 조달하게 했다.

1975년 7월부터는 국내에서 생산한 무기류를 구매하고자 방위세를 신설했다.

방위산업체의 국산 병기 개발은 눈부시게 도약했다.

1977년 6월 23일.

중부전선 승진기지에서는 창군 이래 최대 규모의 국산 무기 화력 시범대회가 열렸다.

소총에서부터 155mm 대구경 포까지 각종 국산무기가 등장했다.

한국형 소총, 벌컨포, 장갑차, 500MD 헬기 등 과거 국군에서 보유하지 못했던 병기도 그 위용을 자랑했다.

 

‘우리 국군이 쓸 무기는 우리 손으로 만들어 보자’는 의지가 실체를 갖추어 자주국방의 새 시대를 열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육성에 편중한 정책으로 부작용도 발생했다.

정부의 지원이 대기업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경제력 집중 문제가 싹트기 시작했고, 대기업들의 중복 과잉 투자로 자원이 낭비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5.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의 교두보인 전략적 요충지.

그 지정학적 위치로 해방 이후 또다시 냉전 체제의 최전선에 서야 했던 한반도.

국제 안보 환경이 화해의 시대로 변해갔던 1960년대 후반, 70년대.

오히려 북한의 대남 도발로 안보 위기에 처했던 우리에게 자주국방, 방위산업 육성은 나라와 국민을 지킬 최선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경제개발을 포기할 수도 없는 데다 더욱이 무기를 만들 자본도, 기술도 없던 막막한 상황.

대한민국은 정부의 확고한 의지와 지휘 아래 한편으로 무기 제조 기술을 학습하고 다른 한편으론 중화학공업화와 연계하여 방위산업을 건설했다.

그리고 마침내 국산 무기를 개발,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임동원 / 전 통일부 장관


대개 중요한 지상군의 화력과 기동력은 이때부터 확보가 되는 겁니다. 전부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1980년대 말에 가서는 대부분의 장비가 국산화됩니다.


서정욱 / 전 국방과학연구소 소장 (통신 장비 개발 담당)


국방을 위해서 헌신했지만 그 결과와 성과는 민생 생활의 향상에 있었다는 것이죠. / 좋은 군사 물자 장비품을 개발하니까 그 결과가 더 많은 고용을 창출하고 또 많은 수출을 하고 또 많은 국제 위상을 하고


박종철 /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물론 이런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당시 너무 단기간에 국가 주도로 되다 보니 여러 가지 특혜와 관련된 정경유착의 문제/과잉 투자와 중복 투자가 굉장히 많은 국가적인 부담이 됐습니다.


미군의 무기를 분해해 역설계하는 것으로 시작한 우리의 방위산업.

국가 안보를 스스로 지키고자 한 도전과 집념의 1970년대를 거치면서 한민국은 자주국방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