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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세계와 소통하다


1.


문 밖은 새로운 세계였다.

열 것인가, 빗장을 걸어 잠글 것인가.

19세기 말, 동아시아의 작은 왕국 조선이 문 앞에 섰다.

위기일 수도, 기회일 수도 있는 선택의 순간.

조선은 문을 열었다.

개항.

특정한 항구를 열어 외국 선박의 출입을 허용하고 외국과 통상 관계를 공식화하는 일.

과연 조선의 개항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개항 이후의 급작스런 변화에 조선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1876년, 강화도조약을 맺은 이후 30여 년.

개항기의 조선을 들여다본다.


2.


19세기 중반, 아시아는 격변의 시간을 겪고 있었다.

무역 패권을 차지하려는 유럽 열강들의 다툼 때문이었다.

16세기 이래, 새로운 교역로를 찾아 아시아로의 바닷길을 개척한 유럽 열강들.

산업혁명이 진행되는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원료공급지와 상품시장을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아시아 지역으로의 진출을 확대해 나갔다.

 

일찍부터 서양과 활발하게 교류했던 인도를 비롯해 미얀마, 말레이 반도 국가들이 연이어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베트남, 캄보디아 등은 프랑스에,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에 지배되었다.

유럽 열강들은 수호 조약이나 통상 조약의 체결 없이 무력을 앞세워 아시아 국가들을 지배하고 무역을 독점해 나갔다.

 

그렇다면, 아시아 동쪽에 위치한 한중일은 어땠을까?

한중일 삼국은 기본적으로 쇄국정책을 유지했지만, 19세기 초 유럽의 적극적인 통상 요구로 대외정책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편전쟁에서 패한 중국이 제일 먼저 문호를 열었다.

영국과 난징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일본은 1853년, 미국 페리 함대의 무력시위를 계기로 정책 기조를 쇄국에서 개항으로 바꾸었다.

 

조선 역시 ‘개항’이라는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과 직면했다.

18세기 후반부터 이양선이라 불리는 서양 선박들이 조선 근해에 빈번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선에 최초로 통상을 요구한 것은 동인도회사 소속의 영국 상선 로드 암허스트호였다.

조선은 이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이후로도 조선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고수했다.

하지만 서양세력의 진출과 함께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균열하기 시작했고 조선 역시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만 했다.

조선 정부 내에서는 개항을 두고 두 가지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전통 문명과 질서 안에서, 즉 쇄국정책을 유지하면서 자체적으로 부국강병책을 추진하자는 주장.

서양 문명의 우월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수용함으로써 부국강병을 이루자는, 즉 근대화를 적극 추진하자는 것이 또 다른 주장이었다.

사실 대외 개방의 주장은 이미 18세기 말부터 있어 왔다.

박지원, 박제가 등의 북학파 실학자들은 일찌감치 개방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청과의 활발한 교류와 서양 선진 기술의 도입을 주장해 왔다.

이들의 학문적 주장은 이규경, 최한기로 이어졌고 19세기 후반 박규수에 이르러 정치적 영향력을 갖기 시작했다

대원군 집권기에는 전자인 척화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훨씬 강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이후 척화론은 더욱 강화되었고,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워 쇄국정책을 더욱 확고히 하고자 했다.

그러나 1873년, 대원군이 퇴진하고 고종이 친정하면서 쇄국의 기조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역시 급변했다.

중국은 자신의 지배력을 계속 유지하고자 했지만 개항 이후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근대국가 수립에 성공한 일본은 이미 전통질서의 틀을 벗어나 신흥 제국주의로 향하고 있었다.

굳게 걸어 잠근 조선의 문을 연 나라는 구미 국가가 아닌 제국주의 후발 국가였던 일본이었다.

사실 구미 국가들은 조선에 관심이 적었다.

그들은 상품시장으로서의 가치가 컸던 중국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그들에게 조선은 자국의 주권을 지키고 이익을 확보할 수 있는 돌파구였다.

일본은 조선 개항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1868년 메이지 정부를 수립하면서 국교 수립을 요청했던 일본.

외교문서인 서계를 문제 삼아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1875년, 일본은 군함 운요호를 앞세워 무력시위를 펼쳤다.

이어, 1876년 2월 일본은 또다시 사절단을 파견, 운요호 사건 처리를 명목으로 조선의 개항을 압박했다.

척화론자들은 왜양일체론을 주장하며 교섭을 반대했다,

그러나 조일수호조규, 이른바 강화도조약은 교섭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안 된 1876년 2월 27일에 최종 타결됐다.

 


김종학 연구위원 / 동북아역사재단


Q. 강화도조약 체결이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이유는?


조일수호조규 체결 당시에 일본의 입장은 가급적 빨리 조약을 체결해서 돌아가는 데 있었습니다. 조약 내용상의 실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포함외교, 당시 서양 열강들이 동아시아 국가들에 대해서 자행했던 포함외교의 방식을 통해서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다, 이 사실을 대내외적으로 강조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죠.

 

 

조약이 신속히 체결된 것은, 일본의 의도에 더해 고종 등 집권세력 내에서 개화파의 영향력이 커진 결과였다.

이에 따라 조선은 부산과 원산, 제물포를 잇달아 개항했고 일본의 조선 해안 측량을 허용했다.

치외법권, 즉 일본인과 관련된 일체의 사건은 일본인 관리가 재판할 수 있는 권한까지 내주었다.

이후 8월 24일 체결한 조약의 부록과 무역규칙에서는 일본 화폐의 유통, 무관세, 쌀의 무제한 수출 허용 등을 규정했다.

강화도조약은 국가주권을 제약하고 있는 점에서 불평등조약이었다.

주목해야 할 조항은 제1조 “조선국은 자주국이며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는 것.

 


김종학 연구위원 / 동북아역사재단


Q. 제1조의 의미, 이것에 대한 조선, 중국, 일본의 해석


조선 측에서는 그 조항에 대해서 전혀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자명한 역사적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당시에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조선을 자주지방이라고 했는가. 언젠가는 우리(일본)도 그것을 자의적으로 청나라의 간섭을 배제하는 구실로 쓸 수 있다는 판단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일본의 저의와는 별개로 강화도조약 제1조는 조선이 만국공법의 국제체제에 편입된 것을 의미한 것이었다.

이후 조선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과 근대적 통상조약을 체결하는 등 조선의 국가 주권을 확인해 갔지만, 한편으론 열강에 침략의 발판을 내주고 말았다.


3.


시간이 지날수록 개화정책의 필요성은 분명해졌다.

통치 기반을 안정시킨 고종은 드디어 개화의 뜻을 펼치기 시작했다.

조선 정부는 제2차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해 급변하는 국제 정세, 근대적인 제도, 산업 및 과학 기술 동향을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정부의 이런 노력은 위정척사론을 자극했다.

특히 김홍집이 들여온 <조선책략>의 배포로 반발은 더욱 커졌다.

주일 청 참찬관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면 서양의 제도와 기술을 배울 것’과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해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하여 자강을 도모할 것’을 권고했다.

이를 계기로 전국에서 상소가 빗발쳤다.

고종을 비판하는 홍재학의 ‘척왜소’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근대화의 필요성을 인식한 고종은 이들의 요구를 물리치고 개화의 길로 나아갔다.

정부는 기존 의정부와 6조 체제로는 개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힘들다는 판단 아래 근대적 행정 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새로 설치했다.

통리기무아문은 일본에 또다시 조사시찰단을 파견해 정보를 수집하고 무기 제조 기술을 배우고자 중국에 영선사를 파견했다.

대내적으로는 가장 먼저 강병책을 추진했다.

1881년, 부국강병의 의지를 담아 신식 군대 별기군을 창설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관세를 부과할 수 있게 되자 1883년 인천, 원산, 부산에 세관을 설치해 관세행정을 시작했다.

신문을 발행하는 박문국을 설치해 개화사상과 정책을 보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개화정책의 진행은 순탄하지 않았다.

별기군에 밀린 구식 군대가 일으킨 임오군란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군을 출병시켜 군란을 진압한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깊게 개입했다.

청나라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여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분명히 천명함으로써 전통적인 사대관계의 단순한 복원을 넘어 실질적인 지배권을 추구했다.

청나라의 간섭은 개화 정책의 추진을 제한했을 뿐 아니라 개화 정책 추진세력 간의 대립을 일으켰다.

개화정책을 주도한 온건 개화파는 청나라와의 사대관계 속에서, 동도서기론, 즉 우리의 전통 질서를 유지하면서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도입하자는 개화정책을 주장했다.

반면에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는 청나라와의 사대관계는 물론 성리학 이념과 정치체제까지 바꾸는 근본적인 개화정책을 주장했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은 청나라의 개입 이후, 개화 정책의 방향에 불만을 가진 급진 개화파가 일본 공사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정변이었다.

 


박은숙 박사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Q. 갑신정변에서 제시한 정강 14개 조의 주요 내용 및 의의는?


갑신정변에 참여한 행동대원을 분석해 보니까 일반 평민 계층의 사람들이 굉장히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갑신정변에는 주도 세력뿐만 아니라 행동대원으로 참여했던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의 새로운 사회에 대한 꿈과 이상이 함께 반영되어 나타난 개혁운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변으로 실권을 잡은 급진 개화파는 청나라에 대한 사대관계 폐지, 문벌 폐지, 인민 평등, 신분 제도 철폐 등 근대적 개혁 정책을 발표했지만 청나라의 군사 개입으로 삼일 천하에 그치고 말았다.

정변 진압 이후 청나라의 내정 간섭은 더욱 심해졌다.

제일 먼저 반청 세력의 기반이었던 통리군국사무아문, 우정국 등을 폐지했다.

1885년,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사의’로 조선에 부임한 위안스카이는 조선 정부 내 친청 세력을 지원함과 동시에 고종 등 왕실 세력의 개화 정책을 견제했다.

내무부 설치, 군사제도 개혁, 연무공원과 육영공원의 설치 등 고종이 펼쳤던 개화 정책은 재원 부족과 청나라의 간섭 때문에 제대로 추진될 수 없었다.

 

개항은 백성들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개화 정책의 재원을 마련한다는 이유로 국민의 조세 부담은 늘어났고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는 더 극심해졌다.

게다가 외세의 경제 침탈이 가속화하고 있었다.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 체결 이후 내륙 시장까지 진출한 청나라와 일본의 상인들이 면제품 등 값싼 공산품을 들여옴으로써 집안에서 면포를 짜던 농민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또한 일본 상인들이 면제품과 공산품을 팔아 얻은 수익으로 곡물을 대량 일본으로 구매해 가면서 백성들은 식량이 부족해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곡물의 수출을 금지하는 방곡령을 내릴 정도였다.

백성들은 민란을 일으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894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맞서 일어난 농민 봉기는 전국적인 농민 운동으로 이어졌다.

농민군이 관군을 누르고 전주성을 점령하자 조선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 군대도 출병했다.

동학 농민군은 외국 군대의 철수와 함께 탐관오리 처벌, 조세개혁, 신분차별 철폐 등의 개혁을 조건으로 정부와 전주화약을 체결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즉시 청일 양군의 철수를 요구했지만 일본은 이를 거절하는 동시에 청나라 군대를 공격했다.

조선에 대한 패권을 유지하려 했던 청.

조선을 자국의 이익선으로 여기며 제국주의 정책을 확대하려 했던 신흥국 일본.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던 것이다.

1894년 6월에 발발한 청일전쟁은 일본군의 일방적인 우세로 전개됐고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됐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공식 포기했고 일본은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잡는 데 성공했다.

 

1894년 7월, 갑오내각은 이런 배경 아래에서 출범했다.

내각을 주도한 김홍집, 김윤식, 유길준 등의 온건 개화파는 동학 농민군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면서 사회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특히 유길준은 미국 유학 후 집필한 서유견문을 정부 고관과 유력자들에게 나눠주며 갑오개혁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널리 알리려 노력했다.

갑오내각은 왕권을 제한하고 내각 중심의 정치를 실시하는 등 국가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다.

모든 조세를 돈으로 내게 하고 재정 기관을 하나로 통합해 자본주의 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했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신분 제도를 철폐해 평등 사회의 기반을 마련코자 했다.

그러나 갑오내각의 개혁은 오래 가지 못했다.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지배력은 약해졌고, 일본이 이를 만회하겠다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과 그에 이은 단발령은 국민의 반발을 샀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이 1896년 2월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자 갑오내각은 붕괴했다.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고종과 측근 세력은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균형을 이용하여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수립했다.

대한제국은 구본신참, 즉 ‘옛 제도를 근본으로 하되 새로운 것을 참조한다.’는 원리에 근거해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다.

전국적 토지조사사업인 광무양전을 실시하고, 서양의 기술을 도입해 상공업을 진흥시키려는 식산흥업 정책을 펼쳤다.

 


김재호 교수 / 전남대학교 경제학과


Q. 광무개혁의 특징, 의의 및 한계와 대한제국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대한제국의 문제는 대한국국제를 반포해서 황제가 국가의 모든 분야를 완전히 전제적으로 장악을 해서 궁내부, 왕실 재정이 팽창하는 것에 대해서 제도적으로 그것을 통제하고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었다고 하는 것이 사실 매우 큰 문제죠.

 

 

개항 이후 다양한 개화 정책을 추진해 온 조선 정부.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개화정책의 추진에 필요한 재원이 부족했고, 대외적으로는 실질적인 지배를 추구했던 청나라, 일본 등의 외압 속에서 조선의 개화정책은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조선의 근대화 정책은 일제의 강압 속에 좌절되었고 조선은 국권을 빼앗기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4.


그러나 개항 이후 우리의 정치·경제·사회는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고, 근대 의식을 갖춘 새로운 주체들이 사회 곳곳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변화는 개항장에서부터 시작됐다.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 상인들의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대일 무역이 빠르게 성장했다.

개항장이 늘어나고 일본 상인들이 내륙까지 진출하게 되면서 개항은 조선경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가령 일본으로의 쌀 유출이 급증하면서 농업 생산 구조는 쌀 위주의 생산 체제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쌀 수출로 커다란 이익을 거둔 상인들이 토지에 재투자하면서 지주계급이 빠르게 성장했다.

상업자본가도 출현했다.

개항장 객주들은 개항장에서 중개업, 창고업, 여관업, 금융업 등을 영위하며 자본을 축적해 나갔다.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으로 청일 양국 상인들이 서울까지 진출해 상권을 확대하자 조선인 지주와 상업자본가들은 상권을 지키고자 동업자를 모아 상회사를 세워 맞서기도 했다.

그러나 아관파천 이후 열강의 경제적 침탈은 더욱 심해졌다.

일본, 러시아, 미국, 프랑스, 독일 등에 광산, 삼림 등의 자원은 물론 철도, 전차, 해운, 어업, 전기 등 수많은 이권이 넘어갔다.

특히 일본은 우리나라를 경제적으로 지배하고자 금융과 재정을 장악하는 데 힘썼다.

대규모 차관을 제공해 내정을 간섭하고 이권을 획득해갔다.

또한 주요 도시에 일본 제일 은행을 세우고 일본 화폐와 제일 은행권을 유통해 금융을 지배해 나갔다.

이에 우리나라 지배층과 실업가들은 민족자본으로 은행을 설립해 대응했다.

우리은행의 전신인 대한천일은행, 조흥은행의 전신인 한성은행 등 민족계 근대 은행이 문을 열었다.

정부의 상공업 진흥 정책에 부응해 각종 회사도 설립했다.

그러나 은행들은 화폐 정리 사업을 계기로 몰락하거나 일본 은행에 종속되었고 회사는 시장과 자본의 부족, 경영 능력의 제약으로 단명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렇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무역은 빠르게 확대됐고 조선에는 새로운 경제주체들이 출현, 성장해 가고 있었다.

 

개항 이후 외국과의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조선 사회는 외형적으로도 큰 변화를 맞이했다.

전통 한복 대신 서양식 양복을 입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신식 건물, 전등, 전화, 우편, 전차 등 새로운 문명을 상징하는 물건들이 속속 도입됐다.

극장, 다방, 카페 등 문화 시설도 등장했다.

생활의 편리함을 직접 보고 겪게 된 사람들은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변화는 개항 이후 자유와 평등, 민권, 민주주의 등의 개념을 이해하고 수용한 개인들이 출현했고, 이들의 사회의식 또한 빠르게 성장해 갔다는 점이다.

개인들의 사회의식을 높이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신문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는 부국강병을 달성할 방도를 제안하면서 서양의 근대기술은 물론 자유와 평등, 주권, 입헌주의 등의 근대사상을 소개했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것은 1896년 서재필 등이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신문, <독립신문>이었다.

미국 망명 중 서양의 민주주의를 직접 체험했던 서재필은 귀국 후 나라의 자주독립, 자강을 위한 국민 계몽 방안을 고심했고, 그중 하나가 바로 신문의 발간이었다.

독립신문은 민권 사상과 함께 민주주의 담론을 널리 퍼뜨렸다.

신문이 시민 정신을 깨우는 역할을 했다면 근대 학교는 국민과 시민을 키워내는 양성소 역할을 했다.

1883년, 조선에서 처음으로 학교가 문을 열었다.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는 원산 개항장이 있던 덕원에서 문을 연 원산학사였다.

원산 학사는 입학 자격에 제한을 두지 않는 보통교육을 지향했다.

1885년에는 미국의 선교사 아펜젤러가 근대식 중등교육기관,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최초의 근대식 공립학교는 1886년, 헐버트 등 미국인 교사를 초빙하여 세운 육영공원이었다.

육영공원의 입학자격은 젊은 관리와 양반 자제로 제한했다.

정부가 보통교육을 제도화한 것은 1894년 갑오개혁 때였다.

고종은 교육입국조서를 반포해 근대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사범학교, 소학교와 중학교, 외국어학교 등 많은 관립학교를 세웠다.

 


강명숙 교수 / 배재대학교 유아교육학과


Q. 학교 설립 실태, 각급 학교별 교과과정(교과목), 역할 의의는?


개항이 되자 전국에서 전통교육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학교들이 나오게 됩니다. 전통 교육에서는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가르쳤지만, 신식 학교에서는 개항을 대비해서 서구 문물, 특히 서구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일 수 있는 교과들을 가르쳤습니다.

 

 

이때 설립된 학교에서는 산수, 수학, 물리, 농업, 자연과학, 역사와 더불어 정치학도 교육과정에 포함해 근대 세계에 적합한 새로운 인재들을 양성하고자 했다.

신문의 보급과 근대 교육의 활성화는 민권 의식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시민들은 자율적 결사체를 만들어 여론을 형성하며 개혁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효시는 독립협회였다.

1898년 3월, 독립협회 주도로 만민공동회가 열렸고, 그해 10월에는 관리와 시민이 함께하는 관민공동회가 열렸다.

관민공동회에서는 국정 개혁을 위한 6개의 원칙을 담은 <헌의6조>를 의결했다.

놀라운 것은 관민공동회의 개막 연설자로 나선 박성춘, 그는 백정 신분이었다.

신분에 상관없이 민권의식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고 민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국권을 지켜야 한다는 인식 또한 널리 퍼져 가고 있었다.

이는 문화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민족의 자주독립 정신을 북돋는 신소설, 신체시가 등장했다.

또한 서양식 악곡에 우리말 가사를 붙여 부르는 노래인 창가가 유행하면서 애국가, 독립가, 권학가 등이 널리 불렸다.

일제의 침략이 더욱 거세지면서 이런 흐름은, 애국계몽운동으로 이어졌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 일부를 빼앗기자 애국계몽운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국권을 수호하려면 국민 계몽과 신교육의 보급이 시급하다고 인식한 애국지사들은 수많은 애국 계몽 단체와 학회를 조직했다.

아울러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의식을 높이는 교육을 시행했다.

비록 일제에 국권을 빼앗겼지만 개항기의 이런 변화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5.


개항-

조선은 격동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내부 세력 간 갈등과 충돌을 이겨내며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도모했다.

조선의 개항은 위기이자 기회였다.

외세의 압력 속에 국권을 빼앗기고 문화적 전통이 단절되는 위기를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시장경제를 이끌어갈 경제주체들이 출현하고 근대적 사고에 눈 뜬 개인들이 스스로 국가를 지키고 발전시킬 방안을 모색했던 개항기는 결국 독립을 쟁취하고 근대 국가로의 변신을 일궈낸 기회의 기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