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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애국가 / 大韓帝國愛國歌
자료형태 문서 시대/연도 ~ 대한제국(~1910) / 1902
규격 23.5×30.5×0.2㎝
한줄설명 1902년 독일음악가 프란츠 폰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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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대한민국의 국가(國歌)로 통용되는 애국가는 1936년 안익태(安益泰, 1906~1965)가 작곡한 것으로, 관습적으로 ‘국가’로 불리다가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후 대한민국의 국가로 자리를 잡았다. 현재의 애국가 이전 최초의 애국가는 시기적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 대한제국 시기에 탄생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과 1896년 독립협회 결성 이후 민간에서는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많은 애국가들이 작사되었는데 약 10여 종에 이르렀으며, 어떤 곡조로 불렸는지는 모르지만 그 가사들이 독립신문에 게재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대한제국 애국가가 공포되었는데 국가에서 정식으로 애국가를 제정한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대한제국이 선포된 이후 고종은 국가상징물로 애국가의 필요성을 느끼고 1900년 12월에 군악대 설치를 법령으로 공포하였으며, 독일음악가 프란츠 폰 에케르트(Franz von Eckert, 1852~1916)를 초빙하기에 이른다. 에케르트는 독일 해군군악대장으로 재직하던 중 1879년 일본에 초빙되어 일본해군군무국 등에서 근무하며 양악을 보급한 인물이다. 23년간의 일본생활을 마치고 1900년 3월 독일로 귀국하였다가 주한독일공사관의 추천으로 1901년 2월 7일 50인조 정규 군악대의 각종 악기를 가지고 내한하였다. 고종의 명을 받아 이듬해 1902년 7월 1일 한국의 전통적 음계를 바탕으로 한 대한제국 애국가를 완성하였고 이는 같은 해 8월 15일 대한제국 애국가로 공포되었다. 에케르트는 애국가 작곡에 대한 공로로 태극 3등급 훈장을 받았다.

  위 사진 속 자료가 에케르트 작곡의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이다. 표지에는 태극마크를 중심으로 위에는 ‘대한제국애국가’가 한자로(大韓帝國愛國歌), 아래에는 독일어(KAISERLICH KOREANISCHE NATIONALHYMNE)로 적혀있다. 앞표지 상단 태극문양 부분에 '윤치호·YUNCHIHO' 글자가 각인된 도장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윤치호(尹致昊, 1865~1946)가 소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문 1면에는 애국가 제정 경위를 밝힌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의 서문이 있고, 2면에는 한글 가사와 이를 독일어로 번역한 가사가 있으며, 3~6면에는 애국가 악보가 실려있다. 아악조(雅樂調)의 한국적 음률을 가진 이 애국가는 3/4박자의 34마디로 구성되었으며 작사자는 민영환으로 알려져 있는데,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가사에는 당시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충군애국(忠君愛國) 사상으로 일으켜 세우려했던 충정공의 애국심이 깃들어 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 상제(上帝)는 우리황제(皇帝)를 도우사 성수무강(聖壽無彊)하사 해옥주(海屋籌)를 산같이 쌓으시고 위권(威權)이 환영(寰瀛)에 떨치사 오천만세(於千萬歲)에 복록(福祿)이 일신(日新)케 하소서 상제(上帝)는 우리황제(皇帝)를 도우소서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는 세계 오십여 개국에 선포, 발송되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로 일본의 ‘기미가요’가 불리면서 애국가는 금지곡이 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에케르트가 일본의 ‘기미가요’작곡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정식국가로 채택되지 못하였다.
  대한제국 애국가는 시대적 상황으로 역사의 뒤편에 머물렀지만 한국에서 작곡된 최초의 서양음악이며 최초의 애국가라는 지위를 가진다. 정부와의 계약이 끝났음에도 타국에 남아 백우용(白禹鏞, 1883~1930)을 비롯한 양악의 선구자들을 길러낸 애국가 작곡자 프란츠 폰 에케르트, 을사조약에 죽음으로 항거한 애국가 작사자 충정공 민영환의 이야기가 이 자료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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