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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 유리원판 필름
자료형태 사진/필름 시대/연도 일제강점기(1910~1945) / 1932.
규격 16.4x11.9 등
한줄설명 민족적 비애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초기 한국 영화의 미공개 유리원판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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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임과 동시에 한국 영화 100주년의 해이기도 하다. 초기 한국 영화가 새로이 도약하게 되는 전환점을 마련한 무성영화 <아리랑(1926)>과 젊은 나이에 이 영화를 제작하고 배우로서 주연을 맡은 ‘나운규(羅雲奎, 1902~1937)’는 초창기 한국 영화의 대표 영화와 영화인이라 할 수 있다. 나운규는 <풍운아(1926)>, <들쥐(1927)>, <금붕어(1927)>, <잘 있거라(1927)>, <옥녀(1928)>, <사랑을 찾아서(1928)>, <벙어리 삼룡(1929)> 등 많은 작품을 제작하였으나, 그는 배우로서 먼저 영화계에 입지를 굳혔고, 당시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단성사(團成社) 운영주의 후원으로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하고 활동했으나, 그의 무질서한 생활과 동료들의 탈퇴로 인해 회사는 해체되고 그는 일본으로 떠났다. 1932년 한국으로 돌아온 나운규는 <임자 없는 나룻배(1932)>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다시금 좋은 연기를 선보이게 된다.
<아리랑>과 더불어 한국 무성영화 시대에 쌍벽을 이루는 명작으로 평가받는 <임자 없는 나룻배>는 나운규와 마찬가지로 젊은 나이에 이 영화를 제작한 ‘이규환(李圭煥, 1904~1982)’의 처녀 작품이며, 시나리오를 읽어 본 나운규가 자진 삭발하고 나타나 영화 출연을 결심한 일화가 담겨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나룻배 사공 부녀가 겪는 여러 사건들을 통해 일제시기의 암울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며, 일본인 제작진의 도움 없이 한국인 제작진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검열계로부터 민족주의적 사상을 내포했다는 이유로 영화의 마지막 부분이 잘려나가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이번에 소개하는 소장 자료는 이 작품의 유리원판 필름으로, 영화 타이틀과 촬영장 모습, 배우와 제작진들의 기념 촬영, 영화 장면 및 주연 배우들의 모습이 총 11점의 유리원판에 담겨 있다(소개하고 있는 메인 사진은 유리원판 필름 원판 그대로의 모습이고, 다른 사진은 필름에 담긴 상(像)을 조금 더 편하고 뚜렷하게 보기 위하여 색상 반전을 한 사진이다).
첫 번째부터 다섯 번째 필름은 영화 타이틀 제작 모습이나 촬영장 모습 및 배우·제작진들의 기념 촬영 모습으로, 당시 촬영 기자재·세트와 제작 환경 등을 고증해 볼 수 있는 중요 자료라 할 수 있다. 여섯 번째 필름은 영화의 한 장면으로, 도끼를 들고 철길 위에 올라가 있는 주인공 춘삼(나운규)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필름에는 영화 장면 외에 여러 모습이 겹쳐 보이는데, 이는 다중 노출로, 한 번 노출된 필름에 여러 장면이 노출되어 여러 개의 영상으로 겹쳐지게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부터 열한 번째까지의 필름은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는 원본 필름은 남아 있지 않지만, <아리랑>과 더불어 한국 영화사에서 손꼽히는 대표 작품이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임자 없는 나룻배>의 장면뿐 아니라 초기 영화 제작 모습 일부는 한국 영화를 연구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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