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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건설단 홍보포스터
자료형태 전단/홍보물 시대/연도 1960년대 / 1961년
규격 55.0 x 79.0 cm
한줄설명 국무원 사무처 공보국에서 발행한 '3.1정신으로 국토건설과 멸공통일 이룩하자!' 라는 국토건설단의 홍보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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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년 3월 1일부터 약 3개월 동안 추진된 국토건설사업은 5.16 군사쿠데타로 중단된, 박정희 정권기 국토건설사업의 前史로 평가되었다. 해당 자료에서는 장면 정권하 국토건설사업의 내용과 함께 ‘3.1정신’, ‘멸공통일’로 표상되는 국가동원사업의 정치 선전 이미지를 한눈에 관찰할 수 있다.

 

 국토건설사업은 4.19 혁명 이후 경제 발전과 실업 대책의 일환으로 나온 구상이었다. 1960년 가을에 작성된 「한국의 경제개혁방책에 관한 각서」(일명 딜론각서)에서 처음 언급된 국토건설사업은 “발전소 건설, 도로확장, 토지개간, 수자원 개발, 산림녹화 및 기타 경제기반을 공고히 하는 노동집약적인 산업기반건설을 적극 추진”하는 구체적인 실업대책으로 처음 제시되었고, 노동집약적인 사업계획 수행을 위해 ① 인근 지방에 직접 이익이 되는 사업은 수혜민의 자발적인 노동력 제공으로 이룩하고, ② 그렇지 못한 대규모 계획 사업은 <국토건설봉사단>(가칭)을 설치하여 활용할 것이라는 계획을 담고 있었다. 이와 함께 미공법 480호 2관에 따른 잉여농산물 공급을 통한 자금 조달, 환율체계 조정, 원조에 대한 행정·재정협정의 정상화 등의 내용을 언급했다. 이러한 미국 잉여농산물을 통한 실업문제의 합리적 해결 방안이 모색되는 가운데, 당시 부흥부 기획국장 이기홍은 넉시(Rangnar Nurkse)의 이론에 기초해 양곡원조-실업자 구제-낙후된 사회간접자본 개발이라는 국토건설사업을 구상하였고, 1960년 11월 29일 내각회의에서 <국토건설사업 실행요강>으로 구체화 되었다. 주요 내용은 ① 국토의 보전과 개발을 위한 국토건설운동 전개, ② 1961년 3월 1일부터 유휴노동력과 군·관·민·학생 등을 유상 또는 무상으로 국토건설사업에 동원, ③ 실업자와 절량농가에게 최대한 취업의 기회 제공 등이었다. 이후 국토건설본부(본부장 장면)가 설치되고, 예산총액 400억 5백만 환과 미공법 480호 2관에 따른 1,000만 불 원조가 확정되면서 사업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961년 2월 25일  장면 국무총리는 중앙청 기자회견에서 국토건설사업의 목적을 ① 실업자 구제와 절량농가를 위한 노임 살포, ② 공업화의 기초 마련, ③ 국민의 자조 자활의 정신 앙양이라고 밝히고, 치수사업, 도로사업, 도시토목사업, 수리사업, 사방사업, 조림사업, 수리개발사업 등 총 4백억 환의 예산 소요와 연인원 4천5백만 명이 동원되는 국토건설사업의 내용을 발표하였다. 1961년 2월 11일 구성된 국토건설본부는 기획부장 장준하, 관리부장은 신응균, 기술부장 최경렬, 조사연구부장 이만갑으로, 사상계 인사들을 주요 기반으로 조직이 구성되었다.
 
  해당 자료는 국토건설사업의 이러한 내용이 한 장에 밀도 있게 담겨 있다. ‘국토건설사업의 목적’, 치수사업, 도로사업, 도시토목사업, 수리사업, 사방사업, 조림사업, 장기사업으로서 섬진강댐, 춘천댐, 남강댐 건설 내용이 적혀있으며, 국토건설대 참여 방법을 안내하고 있다.
○ 자료의 중앙에 있는 사진<국토건설사업추진요원 종강식, 2월 27일 중앙청에서>은 1961년 2월 27일 중앙청 광장에서 종강식을 가진 국토건설사업추진요원의 모습이다. 국토건설사업추진요원은 1960년 12월 2일 <국토건설대 참가 신인등용 선발시험>을 통해 공개 모집했다. 일명 학사공무원으로 불린 2,056명의 합격자는 이듬해 1월 중순부터 2월까지 서울대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교육계획의 총책임자는 장준하, 주요 강사진은 이만갑, 신응균, 최경렬, 이한빈, 함석헌, 박종홍 등이었다. 이들은 2월 27일 중앙청 광장에서 종강식과 함께 수료증과 월봉 2만 1천 환의 촉탁위임장을 받고 각지에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 자료의 좌측 중앙에 있는 사진<국토건설사업시공식에서 식수하는 장면 국무총리, 3월 1일 경기도 안양>은 국토건설사업 착수 기념식 장면으로, 본격적인 국토건설사업의 추진을 알리는 사진이다.
○ 자료의 우측 하단에 있는 사진은 국토건설사업의 노임으로 지급될 양곡 적재함인 미스트라호가 3월 5일 부산항에 입항하고 있는 장면인데, 1961년 1월 체결된 무상원조협정에 따라 8만 2천 톤의 소맥과 3만 2,750톤의 대맥이 국내로 도입된 것이었다.

 

 위의 자료는 사업의 목적과 내용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더욱 흥미로운 것은 사업 추진을 위해 ‘3·1정신’과 ‘멸공통일’을 소환한 대목이다. 자료의 상단에 “3.1정신으로 국토건설과 멸공통일 이룩하자!”는 구호와 탑골공원에서 열린 3.1운동 33인 중 31인에 대한 합동추념식 사진을 게재한 것은, 3.1운동 정신을 통해 애국심을, 반공을 통해 적개심을 고취하여, 4.19 혁명 이후 경제 성장과 실업 문제 해결 대한 열망을 국토개발사업이라는 구체적인 실천 과제를 제시함으로써 국민 동원을 통해 풀어나가려는 것으로, 장면 정권의 개발주의 담론 확산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우리 자신의 발전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라는 문구를 통해 장면이 주장한 자조자활 정신의 표상적 의미도 위의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치밀하지 못한 사업계획과 추진 과정에서 여러 문제로, 막대한 자금을 투여해 실시한 국토건설사업은 실업자 구제와 빈곤 극복, 경제 활성화라는 당초 목적에는 사실상 실패한 사업으로 평가된다. 군사정권이 수립되면서 사업 진행이 중단되었고, 이후 진행된 국토건설사업은 그 취지와 성격도 변하게 된다.

 

참고문헌
신용옥, 「박정희정권기 국토계획의 전개 과정과 동해안지역의 위상」, 『島嶼文化』 41, 2013
이상의, 「한국전쟁 이후의 노무동원과 노동자 생활」, 『한국사연구』Vol.145, 2009
임송자, 「민주당 정권기 국토건설사업의 추진과정」, 『사림』 제46호, 2013
임송자, 「1961년 5·16 이후 국토건설사업과 국토건설단 운영 실태」, 『한국근현대사연구』 67, 2013
임송자, 「반공이데올로기에 기반한 노동담론의 지형(1945~1950)」, 『역사학보』 제238집, 2018
한규한, 「5·16쿠데타 직후 국토건설단과 지식청년 ‘군기잡기'」, 『역사비평』 No.11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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