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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KI DDL-105 재봉틀
자료형태 생활물품/기타 시대/연도 1960년대 / 1960년대
규격 51.0×17.5×32.0
한줄설명 TOKYO JUKI INDUSTRIAL회사에서 제작한 재봉틀(DDL-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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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나비 담장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누군가는 1989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부른 <사계>의 멜로디가, 또 누군가는 2001년 ‘거북이’가 리메이크하여 부른 <사계>가 생각 날 것이다.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모른 채 봉제 공장에서 끊임없이 일을 해야만 했던 그 시대의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이 느껴지는 가사이다. 그 시절 멈추지 않고 돌아가던 재봉틀과 수많은 봉제 노동자들은 우리나라 산업의 발전에 이바지한 숨은 역군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재봉틀은 TOKYO JUKI INDUSTRIAL에서 제작한 재봉틀로 2014년에 기증을 받아 현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소장하여 관리하고 있다. 기증자가 결혼 당시 구입한 재봉틀로 1967년 구매하였다고 한다. 정면에는 ‘DDL-105’ 라고 기기명이 적혀 있는데 공업용으로 사용된 재봉틀의 초기 모델로 알려져 있다. 기증자는 구입한 재봉틀로 남의 집 삯바느질도 했다가 나아가 청계천 근처에서 아동복 및 숙녀복을 제작하는 봉제공장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재봉틀은 한 마디로 ‘바느질하는 기계’이다. 1790년 영국인 토마스 세인트(Tomas Saint)가 인간의 손바느질을 최초로 기계화하는 시도를 하였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재봉틀 기술의 초석을 닦은 사람은 미국의 엘리어스 하우(Elias Howe)로 알려져 있다. 이후 재봉틀은 아이작 싱어(Isaac Merrit Singer)에 의해 본격적으로 가정용과 공업용 제품으로 나뉘어 발전하였다.

우리나라에 재봉틀이 가장 먼저 들어온 시기는 1877년으로 알려져 있다. 강원도 금화(金化)에 사는 김용원(金鏞元:독립운동가 김규식의 부친)이 일본에 갔다가 서양 사람에게서 신기한 기계를 사 왔는데 그것이 '재봉틀' 이었다고 한다. 이후 지속적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며 뒤이어 1896년 이화학당의 교과목 가운데에 재봉과 자수가 등장하였다. 1904년 3학년 교과목에는 '재봉기 사용법'이 포함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05년 12월 20일 자 제국신문에 '싱거 재봉기계회사의 대한나라 지점 설시와 방매'라는 광고 등으로 미루어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재봉틀의 대중화가 시작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인들이 재봉틀을 ‘소잉 머신(sewing machine)’을 줄여 머신, 즉 ‘미싱’이라고 불렀고 이로 인해 우리도 ‘미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6년에 최초로 국산 재봉틀 생산에 성공하였으며 이후에는 국산 제품을 생산하여 사용하였다.

재봉틀은 산업화 과정에서 경제 성장을 이끄는 지대한 역할을 했다. 재봉틀 없이 우리나라 경제를 부흥시킨 봉제 산업의 발전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무렵 공장에서 쉴 새 없이 돌아가던 재봉틀 소리는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알리는 소리였다. 1990년대 이후 기성복의 보편화와 생활수준의 향상 등으로 재봉틀을 갖춘 가정은 점차 줄어들었고 봉제 산업이 침체되면서 재봉틀은 우리 주변에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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